ⓒ시사IN 이명익이정식 작가가 자신의 작품 ‘이정식 11’을 마주 보고 있다.

전시실은 어두웠다. 관람객들이 쓴 하얀 마스크가 두드러졌다. 한쪽 벽면을 채운 영상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누굴 감염시켰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혹시라도 그 사람이 감염되었다면, 감염인으로 살아간다면 약을 잘 먹고 있는지 걱정될 뿐이에요.” 그때 여기저기서 동시에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안전 안내 문자였다. ‘[○○구청] 확진자 4명 발생. 역학조사 진행 중이며 이동 동선은 추후 홈페이지 및 블로그 참고 바랍니다.’ 바깥세상에서도, 10월14일부터 11월14일까지 낙원악기상가 갤러리 d/p에서 열린 〈이정식 개인전〉 전시장에서도 ‘감염’이나 ‘확진’이라는 단어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이정식 작가(33)는 영상 작품에 ‘김무명’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김무명은 2013년 8월 경기도 남양주의 수동연세요양병원에 입원했던 에이즈 환자다. 그는 호흡곤란을 호소했지만 치료를 받지 못한 채 13일 만에 사망했다. 그의 실제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름이 없다는 뜻에서 ‘김무명’이라고 불렸다. 작가는 2020년 현재를 살아가는 또 다른 ‘김무명’들을 인터뷰해 그들의 목소리를 작품에 담았다.

이정식 작가 역시 HIV(후천성면역결핍 병원체 바이러스) 감염인이다. PL이라고 불린다. PL은 ‘HIV/AIDS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People Living with HIV/AIDS)’이라는 뜻으로, 에이즈 환자를 편견 없이 지칭하는 단어다. 그는 ‘작가’ 대신 ‘정식씨’라는 호칭을 더 편하게 느낀다. 작가 앞에는 어김없이 ‘HIV 감염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제가 엄청 용기 있는 사람도 아니고 깨어 있는 사람도 아닌데, PL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나니까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 있더라고요. 제가 뭘 하든 ‘감염인 작가’라는 딱지가 떨어지지 않아요.”

정식씨는 학교폭력과 가정폭력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일곱 살에 집을 나왔다. 고향인 대전을 떠나 서울에 있는 청소년 쉼터에서 지냈다. 그때 친하게 지냈던 몇 안 되는 친구 중 한 명은 나중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일본으로 일하러 건너가는 트랜스젠더들이 많았거든요. 그들을 ‘미스 코리아’라고 불렀어요. 후쿠오카, 신주쿠, 나고야, 오사카…. 미스 코리아가 없는 곳이 없었어요. 큰 도시에는 다 있었으니까요.” 정식씨의 친구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 친구는 항구도시인 요코하마의 한 빌딩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됐다. 당시 스물두 살이었다.

친구의 죽음 이후 정식씨는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표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스스로와 주변 소수자들을 소재로 글과 영상, 조각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았다. 2013년 12월이었다. 별다른 충격은 없었다. 애초에 남들이 살아가는 일반적인 삶을 꿈꿔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웃으며 인사하고 헤어졌는데 2주 후에 자살했다는 부고를 듣게 된 지인의 소식이 더 충격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HIV 감염 자체만으로 삶에 생채기가 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감염 사실을 밝혔다. 2017년 첫 전시에는 HIV 치료제를 녹여 캔버스에 바른 작품을 전시했다. 매일매일 치료제를 먹었던 시간을 기록하는 작업도 했다.

올해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그는 별다른 충격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되묻고 싶어요. 그들이 말하는 ‘코로나 이전’이라는 시대가 과연 어떤 시대였는지, 지금과 그렇게 크게 다른 시대였는지.” 감염되는 순간 가해자가 되는 건 코로나19든 에이즈든 똑같았다. 대구에서 대유행이 번졌을 때는 신천지 신도들이 가해자가 되었고, 5월에는 서울 이태원 클럽을 다녀온 성소수자들이 가해자로 찍혔다. HIV 감염인에게 낙인이 찍히는 과정과 비슷했다. “말도 안 되는 혐오가 계속 작동하고 있었던 거죠. 여기엔 피해자가 없어요. 감염되는 순간 모두 가해자가 되는 거예요. 통제되지 못하는 전파력 높은 바이러스 때문에 사회적 질서나 규칙이 무너지니까 혐오가 더 잘 보일 뿐이죠. 사실 달라진 건 없어요.”

사람들이 비장한 목소리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그 순간에도 약자를 향한 혐오는 반복되고 있었다. “저는 또 묻고 싶네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그들은 과연 그동안 장애인, 노숙인, 성소수자, 감염인, 이주노동자들을 향한 혐오를 어떻게 바라봐왔을까요. 그런 폭력을 이제야 인식하게 된 건 아닐까요.” 정식씨는 자신에게 일상인 혐오와 낙인과 배제가 누군가에게는 충격적일 만큼 드문 경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실 제 주변에는 누군가 계속 죽어나가고 있거든요. 올해에만 부고 소식을 네 번 들었어요. 트랜스젠더들만요.” 한 명은 사고사였고 한 명은 고독사였다. 두 명은 자살이었다.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코로나 이후엔 그들이 죽지 않을 수 있을지, 정식씨는 세상에 묻고 싶다.

ⓒ시사IN 이명익석고 두상은 ‘감염인 작가’라는 꼬리표로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텅 빈 시선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세 번째 개인전을 끝낸 요즘 정식씨는 군 의문사 유가족들을 만나고 있다. 군 의문사를 주제로 한 공연에 참여했던 친구를 통해 우연히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다. “이분들이 무엇보다 힘들어하시는 게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거였어요. 제가 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말하지 못하게 하는 거, 듣지 않는 거, 계속 억누르는 거는 어렸을 때부터 제 주변에서 늘 벌어지는 일이었거든요.”

팬데믹 이전 세상은 ‘노멀’이었나

그는 병역거부자다. 병역법 제88조에 의해 교도소에 들어간 날 그는 독방에 갇혔다. “생각해보니 그때도 바이러스가 한창이었네요.” 2009년 인플루엔자가 대유행하고 있을 때였다. 모든 수용자는 들어가자마자 일주일 동안 독방에 격리 조치를 받아야 했다. 정식씨는 독방의 풍경을 자세히 기억했다. 천장에 잔뜩 핀 까만 곰팡이는 감시카메라로, 차가운 나무 바닥으로 이어졌다. 유일하게 화장실 쇠창살 너머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1년 반 동안 수감돼 있으면서 그에게는 ‘성소수자’ ‘HIV 감염인’ 외에 ‘병역거부자’라는 또 하나의 낙인이 새겨졌다. 군 의문사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작업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가  뭘 하고 싶다, 뭐가 되고 싶다 이런 소망은 없어요. 다만 세상에 들리지 않는 이런 목소리들을 내가 증폭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해요.”

정식씨는 코로나19 팬데믹이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다시는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뉴노멀(new normal)’이 아니라, 이전이 과연 모두에게나 ‘노멀(normal)’이었던 세상인지를 묻는 기회다.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해본 사람들의 목소리에 사회가 좀 더 귀 기울일 수 있지 않을지 정식씨는 희미하게 기대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한 번씩 삶이 흔들리는 ‘소수자’의 경험을 해봤을 테니 말이다. 이것이 2020년을 보내고 2021년을 맞는 정식씨의 송년 소감이자 신년 소망이다.

〈2020 올해의 인물올해의 정은경과 내년의 우리들
〈2020 올해의 인물유엽이의 죽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2020 올해의 인물〉 “왜 사춘기를 갖다 붙이는 거지?”
〈2020 올해의 인물여성 택배 노동자로 사는 것
〈2020 올해의 인물코로나19 전부터 감염자로 살았다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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