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양한모

누군가의 롤 모델이 되는 걸 상상해본다. 자신과 흡사한 길을 걷는 이들과 스쳐 지날 때마다 ‘당신이 내 인생의 길잡이’라며 고백받는 삶. 겪어봐야 알 일이지만 당사자의 마음은 분명 벅찬 기쁨만큼이나 묵직한 책임감이 자리할 것이다. 올해로 활동 28년 차, 데뷔 1만 일을 넘어선 가수이자 배우 엄정화는 이 가설을 증명할 귀한 인물 가운데 하나다.

1993년 데뷔곡 ‘눈동자’ 발표 이후 가수로서 그의 행보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이었다. 특히 짧은 생명이 당연하다 여겨온 여성 솔로 댄스가수로서 남긴 흔적이기에 더욱 소중했다. ‘배반의 장미’를 타이틀로 한 3집 〈후애(後愛)〉(1997)의 대성공 이후 ‘포이즌’(1998), ‘몰라’(1999)가 연속으로 히트했다. 앨범 참여진의 면면도 화려했다. 환상의 호흡으로 가수 엄정화의 전성기를 일궈낸 작곡가 주영훈을 비롯해 김창환, 윤일상, 박근태, 김형석, 윤상, 정재형, 조규만, 이현도, 박진영 등이 그에게 곡을 선사했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종합선물세트 수준의 라인업이었다.

이렇듯 엄정화의 남다른 촉과 존재감은 음악적으로 완성도 높은 댄스 앨범이라는, 한국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을 것만 같던 유니콘 같은 결과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각각 2004년과 2006년 발표한 8집 〈셀프컨트롤(Self Control)〉과 9집 〈프레스티지(Prestige)〉는 장르 음악에 대한 과감한 접근이 돋보인 앨범이었다. 메이저에서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가수가 달파란, 프랙탈, 캐스커, 지누, 방시혁, W, 페퍼톤스 등 개성 넘치는 음악가들과 함께 이토록 순도 높은 일렉트로니카 앨범을 발표하리라 쉽게 예상한 이는 없었다. 그는 결국 앨범 〈프레스티지〉로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앨범’상을 받으며 남다른 화제를 모았다.

가수 경력만큼 배우 경력도 탄탄하게 쌓였다. 브라운관과 스크린, 때로는 연극 무대까지, 연기할 수 있는 모든 곳을 섭렵하며 내공을 쌓은 엄정화는 자유연애를 꿈꾸는 비혼주의자(〈싱글즈〉)에서 아이를 잃은 상처를 지닌 연쇄살인범(〈오로라 공주〉), 평범한 주부가 된 한때의 신촌 마돈나(〈댄싱퀸〉)까지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자랑했다. 멀티 엔터테이너라는 단어가 부끄럽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엄정화의 지난 1만 일은 그가 열과 성을 다해 직접 프로듀스한 엄정화라는 인물의 거대한 쇼였다. 때로는 예기치 않은 병마가, 때로는 긴 공백기가 슬럼프가 되어 찾아오기도 했지만, 그것은 지금 하는 일을 “너무 좋아해 단순히 ‘직업’이라 표현하고 싶지 않다”는 그의 순수한 에너지에 금세 수그러들,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었다. 영화 〈오케이! 마담〉과 MBC 〈놀면 뭐하니?〉의 ‘환불원정대’로 다시 대중 가까이에 선 그는 각종 인터뷰를 통해 자신을 롤 모델로 삼는 이들에게 ‘나이에 갇히지 말고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라’는 조언을 몇 번이고 건넸다. 든든한 큰언니이자 믿음직한 프로듀서가 함께하는 이 멋진 쇼가 언제까지나 이어지기를 바란다.

기자명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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