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프리랜서로 지낸 지 1년이 지났다. 직장 생활 8년 차에 퇴사를 한 건 일이 싫어졌거나 조직이 불편해서는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획일적인 ‘생태계’와 오래된 ‘문화’ 때문이었다. 이 괴리가 만드는 불편함을 돌파해보려고 30대 저널 〈삼〉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각자의 자리에서 고민을 스스럼없이 공유할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마침 그때는 애인과 동거할 생활공간을 구하던 시기였다. 두어 달 동안 ‘집 구하기’를 반복하다 애당초 선택지에 없던 혼인신고를 고려하게 되었다. 서울시가 지원하는 신혼부부 임차보증금 제도 때문이었다. 혼인 제도로 차별받는 친구들에 대한 부채감이 커졌지만 내 ‘지갑 계급’을 인지하는 순간 정치적 소신은 잠시 넣어두기로 했다. 정책 금리로 전세대출을 받기 위해 우리는 혼인 제도에 몸을 끼워 넣었다.
우여곡절 끝에 생활 겸 일 공간으로 활용하기에 꽤 괜찮은 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나의 새로운 ‘집·일터’는 회사와 내 방이 분리되던 이전 환경과는 달랐다. 집·일터를 운영하는 데는 온갖 잡다한 노동이 필요했다. 정리정돈을 하고 먼지와 때를 제거하고, 빨래하고, 먹을거리와 생활 품목들을 채우는,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그런 일들이었다. 하루 몇 시간을 진득하니 책상에 앉아서 일하던 방식은 이제 대단한 노력이 필요해졌다. 식빵을 종류별로 만들 정도로 숙련된 가사 노동 노하우가 쌓였지만, 다시 이력서를 쓴다면 경력에 붙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시기에 동거인 역시 일로 분투했다. 그러나 나와 달리 기존 경력의 연장선상에서 새 단계로 넘어갔고 사회적 관계도 불어났다. 생활 동반자로서 고민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사이지만, 우린 지난 1년간 분명 서로 다른 ‘경력 과도기’를 겪었다.
나는 최근에야 드디어 ‘나만의 방’을 가지게 되었다. 여러 번 구조를 바꾸며 얻은 자리에서 이 원고를 쓰고, 1년 만에 비로소 〈삼〉 3호도 만든다. 이제야, ‘뭐 하고 사느냐’는 물음들에 ‘백수’라 답하곤 했던 나의 말이 바뀌었다. 정규 직장에 소속되지 않았다고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것은 아니기에, 간단히 말할 수 없는 내 일을 풀어 설명한다.
요즘 내 옆의 일하는 여성들을 생각한다. 시어머니를 모시며, 두 아이를 키우고, 출근길엔 도시락을 싸오고, 퇴근길에 장을 봐 돌아가던 이전 직장의 40대 후반 팀장님의 이야기다. 그 위에 30대인 고등학교 동창의 이야기가 포개어진다. 육아휴직을 쓰는 동안 남자 동기들의 승진을 구경해야 했던 그녀는 코로나19 시대 독박 육아를 하며 복직을 기다린다. 그 위로 다시, 친한 20대 회사원 동생의 고민이 쌓인다. 그 동생은, 특정 업계에 여성이 드문 이유를 ‘여성들이 회식 자리를 불편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애인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원래 잘하지도 않았던 집안일은 왜 자꾸 내 눈에 보일까. 누군가의 돌봄 노동으로 성장한 건 나만이 아닌데.
제도적으로 보호되지 않는 여성의 돌봄 노동
얼떨결에 혼인 제도 안으로는 들어갔지만 나는 출산 계획이 없다. ‘돈 줄 테니 애 낳으라’는 이 사회는, 여성이 감당하는 돌봄 노동을 제도적으로 보호하지 않는다. 호주제는 폐지됐지만 아이는 아버지의 성을 부여받고, 그 아이를 양육하는 엄마는 커리어를 키우기 어려운 구조가 변함없이 방치된다. 이런 사회가 과연 새로운 출생에 대해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좀처럼 가시화되기 힘든, 세상 ‘당연한 노동’이 여성에게 부과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살고 있다.
-
돌봄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돌봄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문경란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조직위원장)
코로나19 팬데믹은 세상의 많은 것을 바꿨지만, 동시에 사회의 원형질 같은 것을 오롯이 드러낸다. 가정이 임노동의 일터가 되고, 공장과 학교와 식당이 문을 닫고, 세계 여행이 올 ...
-
원피스 하나로 국회의원이 성적으로 소비되다니
원피스 하나로 국회의원이 성적으로 소비되다니
오지은 (프리랜서 콘텐츠 기획자)
2012년에 있었던 일이다. 20대 중반에 갓 입사한 회사에서 업무에 적응하고, 20년 나이차의 상사를 포함한 동료들과 친숙해질 무렵이었다. 신입인 내가 모르는 업계 관계자들이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