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 인스타그램

히프색 지퍼를 연 뒤 마이크를 꺼낸다. 전원은 이미 켜진 상태. ‘망원시장 인기 아이템’이라는 빨간색 골프웨어를 위아래 콤비로 입고 풍성하게 말아 올린 머리에 나비 모양 큐빅 핀만 일곱 개를 꽂았더니 무게가 3.2㎏이다. 진한 ‘루주’를 앞니에 묻힌 채 ‘둘째 이모 김다비’가 활짝 웃는다. “조카들 반갑구나. 인생은 한 번, 노래는 두 번. 많을 다에 비 비자 둘째 이모 김다비입니다.” 어디선가 준비된 응원 구호가 들려온다. ‘국밥천사 김다비! 가짜두성 김다비!’ 트로트 가수 김다비가 자신의 데뷔곡 ‘주라주라’를 100% 립싱크로 부른다. 비가 많이 오는 날 태어난 ‘사연 있는 둘째 이모’가 그렇게 우리에게 왔다.

상체가 발달하고 다리가 얇은 ‘토양인’ 김다비는 ‘빠른 45년생’으로 ‘초’동안이다. 비결은 잠이라는데, 새벽 수영을 다녀와서 맥주 1만㏄, 오후에 에어로빅을 하고 1만㏄, 심야 테니스 후 1만㏄, 총 3만cc를 마시고 드라마를 보다가 뻗는 일과도 한몫하는 것 같다. ‘킬힐’을 신고 약초 캐는 게 특기이고 백반집과 계곡 산장 오리백숙집을 운영했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그가 데뷔하자마자 음원 사이트의 트로트 차트에 진입했다. MBC 〈음악중심〉과 KBS 〈유희열의 스케치북〉 같은 정통 음악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그를 따라 하는 ‘둘째 고모’ ‘셋째 이모’의 영상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5월1일 공개된 ‘주라주라’ 뮤직비디오 영상은 18일 만에 ‘200만 뷰’를 돌파하고 곧 ‘300만 뷰’를 앞두고 있다.

‘둘째 이모 김다비’는 어디선가 본 듯한 한국의 중장년 아주머니를 요약한 캐릭터다. 5월1일 노동절에 발표한 데뷔곡 ‘주라주라’는 ‘남의 호주머닛돈 받아먹기 힘든 전국구 노동자들에게 바치는 노래’다. “입 닫고 지갑 한번 열어주라/ 회식을 올 생각은 말아주라/ 주라주라 휴가 좀 주라” “마라마라 야근하덜 말아라/ 낄낄빠빠 가슴에 새겨주라/ 칼퇴 칼퇴 칼퇴 집에 좀 가자” “가족이라 하지 마이소/ 가족 같은 회사/ 내 가족은 집에 있어요” 같은 가사가 세대를 아우르며 공감을 얻는다.

데뷔 당시 쇼케이스가 라디오 생방송으로 진행됐다는 점도 파격이었다. MBC 〈정오의 희망곡〉에 출연해 음원을 공개하고 전화 연결을 통해 질문을 받았다. 차별화 전략을 묻자 첫째 비주얼, 둘째 마이크 타법, 셋째 어디선가 본 듯한 푸근함과 친밀함을 꼽았다. 청취자들에게 실시간 검색어로 자신을 올려달라고 능숙하게 주문하는 그는 특유의 친밀함을 무기 삼아 KBS 〈아침마당〉까지 진출한다. 거기서 조카인 코미디언 김신영을 언급한다. “우리 신영이가 진짜 천재”라며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자기 입으로 못하니 내 입으로 하는 거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조카라 서열은 뒤지지만 김신영이 없었다면 김다비도 없다. 그는 데뷔 3년 전, JTBC 〈최고의 사랑〉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김신영에 의해 탄생했기 때문이다. 오리백숙을 먹다가 갑자기 백숙집 주인으로 분한 김신영에게 코미디언 김영철이 묻는다. 이름이 뭐냐고. 그때 즉석에서 등장한 이름이 김다비다. 나이를 묻는 질문에 역시 즉흥적으로 ‘빠른 45’라고 대답했다가 그대로 굳어졌다. 70대일 거라는 계산은 못했던 게 ‘초동안’의 가장 큰 비결이다. 김다비의 77년 인생은 그의 캐릭터를 창조한 코미디언 김신영의 17년 방송 생활, 그 집약본이기도 하다.

둘째 이모와 똑같은 체형의 김신영은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행님아’란 코너로 이름을 알렸다. 강호동이 과거 했던 동명의 코너를 패러디했고 동생 역을 맡아 그야말로 신들린 연기를 보여주었다. 간호사를 바랐던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코미디연기학과에 진학해 코미디언 이영자의 가르침을 받은 그는 2003년 SBS 개그 콘테스트를 통해 공채 7기로 데뷔한 뒤 공개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김다비의 등장을 계기로 김신영의 옛 활동 영상도 다시 회자되고 있는데 7세 아이부터 노파까지, 남녀노소 구애받지 않는 발군의 성대모사와 연기 실력을 보여준다.

당시 기사를 찾아보면 대중은 그의 재능보다 한 여성 코미디언이 가진 외모와 체형에 주목했음을 알 수 있다. 상대 연기자가 “루돌프 역 맡을 사람은?”이라고 운을 띄웠을 때 김신영이 자청하면 “요즘은 돼지가 썰매 끌어”라고 받아치는 식의 유머가 주를 이루던 시대였다. 이후 각종 토크쇼에서도 그의 놀라운 식성과 큰 덩치가 강조됐다. 깊은 인상을 남겼던 ‘행님아’ 이미지에선 벗어났지만 또 다른 캐릭터에 갇힌 셈이다.

ⓒMnet 갈무리2019년 8월19일 발라드 ‘안 본 눈 삽니다’를 발표한 걸그룹 ‘셀럽파이브’.

높은 완성도와 천부적인 센스  

그의 끼는 ‘디테일’에 있다. 뛰어난 관찰력을 바탕으로 백반집 아줌마, 세신 아주머니, 고모, 할머니 등 주변 사람들을 재현했다. 다양한 경험에서 우러난 결과다. 그가 학창 시절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막노동을 하고 머리핀, 오이 장사를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2002년 월드컵 당시에는 티셔츠를 팔기도 했다. 당시에도 고무장갑을 머리에 쓰고 시선을 끄는 등 끼를 발휘했다. 〈아무튼, 예능〉의 저자 복길은 김신영의 연기에 대해 “정말 쓸데없이 디테일해서 저렇게까지 집요해야 하나 싶을 정도지만 높은 완성도와 천부적인 센스는 결국 모두를 웃게 만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7년 9월 케이블 채널 MBC에브리원에서 〈무한걸스〉의 방영이 시작됐다. 지금의 김다비를 만든 프로그램 중 하나다. 〈1박2일〉이나 〈무한도전〉같이 남성이 떼로 나오는 예능계 트렌드가 길게 지속되는 동안 유일하게 자리를 보전했던 ‘여성 떼예능’이기도 하다. 송은이·황보·신봉선· 백보람·안영미·김숙 등과 함께 출연한 김신영은 건방진 막내와 힘쓰는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밥집 아줌마’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한 콩트로 화제가 됐는데, 이때의 캐릭터가 김다비의 전신이 되었다. 즉석에서 소품을 마련한 그는 찰진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밥집 아줌마로 빙의했다. 바쁜 시간에 여러 가지 메뉴를 주문하는 손님들에게 “메뉴를 통일하란 말이야”라고 화를 내 모두를 웃게 했다. 〈무한도전〉의 스핀오프(기존 작품의 등장인물이나 설정을 가져와 새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로 시작했으나 한동안 아류 취급을 받았던 〈무한걸스〉는 시즌 3을 지나 2013년 막을 내렸다.

김신영은 2012년 10월부터 라디오 〈정오의 희망곡〉을 진행 중이다. 책 〈아무튼, 예능〉에서 복길은 “라디오 부문이 연예대상의 본상이 될 수는 없는 건지 항의하고 싶을 정도로 그의 라디오는 김신영이라는 재능을 축약해놓은 두꺼운 책 같다”라면서 가장 재능 있는 코미디언으로 김신영을 꼽았다. 그의 라디오를 들은 청취자라면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난데없이 ‘오키도키 매킨토시 이다도시 남양주시’를 외치는데 맥락은 없지만 그냥 웃게 된다. 나무랄 데 없이 청취자와 게스트를 쥐락펴락하는 그는 신 게 먹고 싶다는 임신부 청취자에게 사비로 한라봉을 보내주고 분만 당일 전화를 연결한다. 예능 프로그램 〈세바퀴〉의 패널, 〈나는 가수다〉의 가수 매니저 자리에선 볼 수 없었던 ‘김신영 유니버스’가 라디오에서 펼쳐진다. 그는 최근 MBC 라디오를 10년 이상 진행한 DJ에게 수여하는 ‘MBC 브론즈 마우스’를 수상하기도 했다.

김신영의 오랜 지인인 코미디언 송은이는 김다비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갑작스레 하차 통보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한 방송계 관행이 아쉬웠던 송은이는 2015년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을 시작한다. ‘감을 잃지 않으면 기회는 찾아온다’는 생각에서였다. 자신과 동료들에게 판을 깔아주기 위해 각종 프로그램을 제안하고 제작, 유통까지 영역을 넓힌다. 김신영이 제안한 걸그룹 ‘셀럽파이브’를 현실로 만든 것도 송은이의 의지였다. 일본의 여고생 댄스팀 TDC의 춤을 따라 하고 싶다는 김신영의 아이디어를 듣고 그와 함께 무작정 일본을 찾아가 저작권 동의를 받았다.

재능 있는 연기자와 조력자의 화합

김신영이 주장과 센터를 맡았고 〈무한걸스〉 멤버였던 신봉선·안영미 등이 합류해 셀럽파이브가 결성됐다. 2018년 송은이가 대표로 있던 영상 콘텐츠 제작사 ‘비보TV’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웹 예능 〈판벌려〉를 만들었고 이듬해 JTBC2에서 같은 이름의 프로그램을 론칭했다. 당시 제작 발표회에서 김신영은 10년 전부터 멤버들과 앨범을 만들고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고 싶었다면서 “가장 큰 목표는 앨런 쇼(미국의 토크쇼)를 가는 것이고, MGA(지니뮤직 어워드)와 MAMA(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즈)를 노리고 있다”라는 당찬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김신영 스스로 밝혔듯  ‘김신영의 상상은 송은이의 현실이 된다’. 그는 지난해 송은이가 세운 매니지먼트사 ‘미디어랩 시소’의 세 번째 소속 연예인이 되었다. 김다비의 대표곡 ‘주라주라’는 월요일에 회의하고 금요일에 뮤직비디오를 찍어 탄생했다. 작곡은 이틀 만에 완성됐다.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김신영은 소속사를 옮긴 계기에 대해 말했다.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근데 송 대표님은 내 말을 기억했다가 두 달 뒤에 ‘그때 이렇게 말했었잖아, 우리가 그걸 이제 이렇게 할 거야’라고 해줬다.”

송은이는 ‘2018 백상예술대상’에서 ‘TV부문 여자 예능상’을 수상하며 방송 경력 26년 만에 처음 시상식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앞으로도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동료들과 함께 열심히 놀고 싶고 판을 벌리고 싶다”라던 그의 수상 소감이 시작이었다. 셀럽파이브는 목표대로 그해 MGA에서 ‘올해의 발견’상을 받는다. 무대에 오른 김신영은 “좋아서 하는 일을 더 좋게 만들어준 노장 송 선배에게 영광을 바치겠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MBC 연예대상에서 상을 받은 김숙과 장도연은 각각 25년, 13년 만에 처음 시상식에 왔다는 말을 남겼고, 우수상을 받은 안영미는 송은이·김숙에게 절을 했다.

올해로 이어진 김다비 열풍은 느닷없이 찾아온 행운이 아니다. MC의 옆자리를 드물게 차지하던 여성 코미디언들이 마침내 중심에 섰고, ‘예능의 판’이 바뀌고 있다. 김다비의 활약은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유산슬(유재석), 마미손(매드크라운)같이 제2의 자아로 일컬어지는 ‘부캐릭터(본인 말고 또 다른 캐릭터)’ 열풍으로 김다비의 흥행을 말하기도 한다. 대중은 김신영과 김다비의 관계를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미묘 〈아이돌로지〉 편집장은 “셀럽파이브 때도 그렇고 김다비도 그렇고 기믹(설정)을 가지고 노는 것에 가깝다. 김신영이 도입한 설정에 대중이 (기꺼이) 휘둘리고 있다. 파격적인데 설득이 되는 거다. 이 경우 연예인이 구경의 대상이라기보다 같이 놀고 싶은 상대가 된다. 오랜만에 김신영이 출연한 예전 프로그램을 봤는데 신들린 연기가 정말 미쳤더라. 접신을 연상케 할 정도로 자유자재의 연기가 가능한 인물이다. 그 재능이 이번에 쏟아져나왔다. 궁금한 건 그가 이 모든 연기를 사전에 생각하고 하는지, 애드리브로 하는지 여부다”라고 말했다.

김다비와 김신영같이 재능이 충만한 연기자의 연기는 순수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팬들을 모두 조카라고 부르는 김다비는 선배 가수도 ‘선배 조카’에 불과하다. ‘김연자 조카’를 롤모델로 삼고 있는 그가 오늘도 수많은 조카들에게 말한다. 말투나 화법은 달라지더라도 전하려는 바는 아마 앞으로도 비슷할 것이다. “스트레스 받았던 거 내 노래로 날려주라. 절길(즐길) 준비 되셨나요? 고마 시작합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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