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2012년에 있었던 일이다. 20대 중반에 갓 입사한 회사에서 업무에 적응하고, 20년 나이차의 상사를 포함한 동료들과 친숙해질 무렵이었다. 신입인 내가 모르는 업계 관계자들이 사무실에 찾아올 때면 상사가 나를 소개하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는 상사가 갑자기 내 이름 앞에 이상한 수식어를 붙이기 시작했다. “우리 팀 비주얼을 담당하는 기자입니다.” ‘엥?’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지만, 실수일 거라고 속으로 되뇌며 넘겼다. 그러나 ‘이상한 소개말’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고심 끝에 비주얼 이야기는 꺼내지 마시라고 요청한 후에야 나는 이상한 소개말에서 해방됐다.

지난 8월4일 언론이 류호정 의원의 원피스 출근룩을 기사화한 이후 ‘성희롱 댓글 잔치’가 벌어졌다. ‘업소 다니면 딱 좋은 스타일’. 그의 복장을 비난하는 목소리에는 좌와 우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이 소모적 논쟁을 촉발한 언론이 또다시 이슈화하면서 류 의원은 “원피스 때문에 몇 시간째 인터뷰”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2030 여성들은 또 한 번 분노했다. 원피스는 류 의원과 같은 20대 여성은 물론이고 나를 포함한 30대 여성들도 어디에서나 즐겨 입는 흔한 옷차림일 뿐인데, 직장에서 원피스를 입었다는 이유로 언론과 댓글의 집중포화를 맞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일부 언론들은 성희롱 댓글로 ‘낚시 기사’를 생산하면서 논란을 가중시켰다.

언론이 소환한 정치인의 복장 중에는 13년 전 유시민 당시 의원의 ‘백바지 사건’도 있지만, 그는 적어도 성희롱의 대상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청년 남성 국회의원이 짧은 반바지나 캐주얼한 복장을 입어 기사화됐다면, 성희롱의 표적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다. 류 의원이 당한 일은 27년 전에 한 여성 장관이 바지 정장을 입었다고 시빗거리가 됐던 일이나, 가까이는 8년 전 김재연 당시 의원이 첫 출근에 입은 치마로 ‘길이가 짧네 아니네’라며 지적당했던 날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기록될 만한 또 하나의 여성 혐오 사건이다. ‘이제는 성평등 시대’라는 억지와 백래시가 기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은 지금도 일과 별개의 외모가 마구잡이 먹잇감이 된다. 이걸 언론이 부채질하는 현실을 또다시 목격하다니. 내가 곧 10년 전 개인사를 떠올린 게 설마 우연일까.

겨우 원피스 출근룩에 한 국회의원이 성적으로 소비되는 일이 2020년에도 버젓이 벌어지는 지금은 과연 27년 전보다 진보했을까. 그나마 나아진 사실은 동료 여성 의원들은 물론이고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대표까지 나서서 이번 사태에 대해 짚고 넘어간 점이다. 가장 고무적인 건 류호정 의원 본인이 파렴치한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과 같이 의정 활동을 이어간다는 사실이다. 언론 인터뷰에서 류 의원은 줄곧 옷차림이 아닌 ‘일’에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요청했다. 너무 당연한 이 요청은, 사태를 만들어놓고서 해명 기회를 준다는 듯 뻔뻔하게 다시 류 의원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는 언론에 날리는 분명한 경고의 말이 아닐까.

‘출근룩’ 아닌 국회 의정 활동 취재하라

“지금 활약하는 여성 정치인은 존재 자체로 우리 사회의 성숙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희진 선생의 2012년 칼럼 ‘여성 정치인 시대?’ 속 문구는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20년, 역대 국회 중 여성 국회의원 수가 가장 많지만 여전히 과반에 못 미치는 제21대 국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복장이 아니라, 국회 의정 활동에 대한 시민의 알권리를 보장하는 언론의 공공성이 제자리를 되찾으면 좋겠다. 겨우 국회의원 출근룩을 취재랍시고 사진 찍는 기자의 ‘일못(일 못하는)’ 행태는 애초에 ‘킬 당하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그때가 오기까지 활약할 더 많은 여성 정치인의 존재를 보고 싶다.

기자명 오지은 (프리랜서 콘텐츠 기획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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