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A2013년 7월 오프라 윈프리(사진 왼쪽)는 스위스 취리히의 고급 매장인 트루아 폼므에서 직원에게 진열된 고가의 가방을 보여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EPA스위스 취리히의 고급 매장인 트루아 폼므.

워터게이트나 ‘최순실 게이트’에는 못 미치지만, 조용한 나라 스위스에서도 국내외에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2013년에 발생한, 이름하여 ‘테슐리 게이트(Täschli-Gate)’. ‘테슐리’란 스위스 독일어로 ‘작은 가방’이라는 뜻이다. 스위스 정치인이나 은행가가 관련됐을 듯한 이름이지만 뜻밖에도 이 게이트의 주인공은 미국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다.

2013년 7월, 오프라 윈프리가 스위스를 방문했다. 미국 출신으로 스위스에 귀화한 가수 티나 터너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왔다. 윈프리는 취리히 도심에 있는 고급 매장인 트루아 폼므(Trois Pomme)에 가서 직원에게 진열돼 있던 가방을 보여달라고 했다. 악어가죽으로 된, 약 3만5000스위스 프랑(약 4500만원)짜리 가방이었다. 직원은 ‘그 가방은 너무 비싸다’며 같은 디자인이지만 다른 재질로 된 가방을 권했다. 윈프리는 가방을 보여달라고 다시 요청했고, 점원은 또 거절했다. 세 번째 요청도 거절당하자 윈프리는 아무것도 사지 않고 가게에서 나왔다.

미국으로 돌아간 윈프리는 방송에 출연해 이 경험을 공개했다. “내가 속눈썹도 안 붙이고, 루이비통 가방도 안 들고, 스커트에 샌들만 신고 가긴 했다. 확실한 건 스위스에서 〈오프라 윈프리 쇼〉를 방영하지 않는다는 거다(자신이 누군지 못 알아봤다는 뜻이다). 하지만 가벼운 차림의 흑인 여성이라고 그렇게 대우해도 되나. 인종차별에는 대놓고 ‘N-워드(흑인 비하 표현)’를 쓰는 것뿐 아니라 이런 일상적인 차별도 포함된다.”

매장의 입장은 어떨까. 사건 당시 일했던 직원은 “나는 인종차별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 정도 가격의 가방은 손님이 보여달란다고 해서 보여주는 게 아니다. 윈프리는 권력이 있는 사람이고 나는 한낱 가게 직원인데 방송에서 날 인종주의자로 매도했다”라고 항의했다.

매장 주인도 직원을 두둔했다. “직원은 비싼 물건을 판매할 때의 프로토콜을 따랐다. 직원의 영어가 미숙했던 것도 오해가 생긴 이유 중 하나일 거다. 이번 일은 인종차별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그 직원이 해고당하는 일도 없을 거다.”

당시 스위스 언론의 논조나 내 주변 스위스인들의 반응은 이것이 인종차별이 아니라는 게 대세였다. ‘그렇게 비싼 가방을 흑인이라서 팔기 싫다는 점원이 어딨나’, ‘윈프리는 자기 옷차림도 이유일 거라고 했는데, 스위스에선 원래 갑부들도 소박하게 입고 다닌다’ 등이 내가 스위스인들에게 들은 말이다. 이 사건에 테슐리 게이트라는 조롱 섞인 이름이 붙은 것도 그래서다. 반면 스위스에 사는 내 미국인 친구는 이것이 인종차별이라고 봤다. 미국의 고급 상점에선 점원이 아무 근거 없이 흑인 고객을 의심해 뒤를 따라다니는 일이 흔하다는 것이다.

질문을 던져보자. 재산이 3조원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흑인 여성이자 방송계 거물로 미국 여론을 쥐락펴락하는 윈프리는, 흑인이기 때문에 취리히 의류 매장에서 일하는 백인 여성보다 약자인가. 백인 직원에게 인종차별 의도가 없었다는 건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의도를 빼고 결과만 놓고 볼 때, 비싼 가방을 고객이 요청하는데도 보여주지 않은 건 차별인가 아닌가. 이런 질문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새 없이 미국 방송에서 윈프리의 입을 통해 이 일이 알려지면서, 스위스는 ‘인종차별국’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관광국에는 큰 타격이었다. 스위스 관광청은 트위터를 통해 “우리는 분노하고 있다. 이 사람(직원)의 행동은 끔찍하게 잘못된 것이다”라며 윈프리에게 사과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스위스 방송 SRF는 매년 말에 한 해의 이슈를 정리하고 순위를 매긴다. 그해에는 테슐리 게이트가 1위로 꼽혀 이 사건을 재현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방송됐다.

백인 여성 코미디언 비르기트 슈타인에거가 얼굴은 검게, 입술은 빨갛고 두껍게 그린 뒤 머리엔 까만 곱슬머리 가발을 쓰고 등장했다. 그는 가방 가게에 나타나 “아, 우비비비”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가방을 이것저것 꺼내 집어던지고 소란을 피운다. 직원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의 비위를 맞춘다.

이것은 멍청해 보이는 흑인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걸 비웃는, 전형적인 ‘블랙페이싱(blackfacing)’이었다. 스위스 관광청의 ‘억지 사과’가 스위스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일까. 그렇게라도 인종차별국이라는 오명을 쓴 ‘억울함’을 풀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오히려 SRF의 이 방송 탓에 스위스는 인종차별국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테슐리 게이트 자체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 방송은 명백한 인종차별이다. 비난이 쏟아지자 SRF는 “어디까지나 풍자였다. 예술로 인정해야 한다”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dPA2013년 1월6일 독일에서 주현절에 블랙페이싱을 한 아이가 메르켈 총리를 방문했다. 흑인 동방박사 역을 맡은 아이의 흑인 분장은 전통이었으나 문제가 되었고, 이제 아이들은 총리 방문 시 분장을 하지 않는다.

백인 아이의 흑인 동방박사 분장은?

테슐리 게이트가 흥미로운 건, 인종차별이나 블랙페이스에 대한 인식이 미국과 유럽에서 꽤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독일은 매년 새롭게 널리 퍼진 영어 단어를 ‘올해의 영단어’로 선정한다. 2014년에 선정된 단어가 ‘블랙페이싱’이었다. 그해 월드컵 독일-가나전에서 독일 관중 일부가 얼굴을 검게 칠했다. 소셜 미디어에서 이들의 사진이 퍼지며 논란이 커지자 국제축구연맹(FIFA)은 인종차별 행위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블랙페이싱을 올해의 영단어로 고른 심사위원단은 이렇게 밝혔다. “독일에서 오랫동안 블랙페이싱이 있었지만 특별한 이름이 없었다. 블랙페이싱이라는 영어 단어가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이 행위의 여러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블랙페이싱이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던 유럽에서 블랙페이싱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유럽의 많은 나라는 매년 1월6일을 ‘주현절(Epiphany)’로 기념한다. 3인의 동방박사가 예수를 찾아간 날이다. 독일, 오스트리아 등에선 이날 아이들이 동방박사로 분장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자선기금을 모은다. 동방박사 중 하나인 발타자르는 흑인으로 알려져 있어, 발타자르 역을 맡은 아이는 얼굴에 검은 칠을 하는 게 오랜 전통이다. 신년에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옆에 얼굴을 검게 칠한 아이가 나란히 있는 사진이 언론에 실린다. 이 전통이 문제시되어 이제 아이들은 총리를 방문할 때 블랙페이싱을 하지 않는다. 최근 3~4년 사이에 생긴 변화다.

유럽 블랙페이싱의 선두주자는 네덜란드다.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산타클로스의 네덜란드 버전인 신터클라스(Sinterklaas)가 시종을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준다. 시종은 츠바르테 피트(Zwarte Piet), 즉 ‘검은 피트’라고 불린다. 대개 얼굴에 검은 칠을 한 백인이 까만 곱슬머리 가발을 쓰고 두껍고 붉은 입술로 분장한 모습이다. 엉뚱한 짓을 하며 아이들을 웃기거나 과자를 나눠주는 역할이다. 네덜란드에서 150년 이상 된 전통이다.

여러 이야기 속에서 츠바르테 피트는 무어인이라고 전해진다. 무어인은 보통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를 일컫는 말로, 8세기에 스페인을 침략해 800년 가까이 지배한 세력이다. 이들의 피부는 까맣다기보다 갈색에 가까워서 때로는 태닝을 많이 한 남부 유럽인과 구별이 어렵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의 주인공 오셀로가 바로 무어인이다. 2015년 유엔 인종차별 철폐위원회는 네덜란드에 츠바르테 피트 캐릭터를 없앨 것을 권고했다. ‘제아무리 뿌리 깊은 문화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더라도, 그것이 차별과 편견을 정당화할 순 없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선 여전히 크리스마스 시즌에 츠바르테 피트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꾸준한 문제 제기 덕에 최근 분명한 변화가 생기고 있다. 2013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네덜란드 국민의 90% 이상이 츠바르테 피트를 인종차별적이라고 보지 않았고 그의 까만 얼굴색을 바꾸는 것에도 반대했다. 2018년 설문조사에선 44%가 얼굴색을 바꿔도 좋다고 했다. 전통을 바꿀 수 있다는 의견은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대도시에 거주할수록, 젊을수록 더 강하다.

ⓒAFP PHOTO네덜란드의 ‘검은 피트’ 분장 전통은 최근 들어 바꾸어도 좋다는 의견이 많아지고 있다.

질문과 소수 의견은 언제나 필요하다

인종차별을 고발하기 위한 블랙페이싱도 있었다. 2009년 독일 기자 귄터 발라프는 소말리아 흑인으로 분장하고 언더커버 카메라 팀과 독일 전역을 14개월간 여행했다. 그 기록을 바탕으로 독일에서 흑인이 받는 차별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흰색 위의 검은색(Black on White)〉이다. 여행 당시 60대 후반이었던 발라프는 평생을 ‘언더커버 저널리즘’에 바쳐온 기자다. 20대 초반에 광부로 위장한 것을 시작으로 콜센터 직원, 터키 이주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로 변장하고 현장에 잠입해 기사를 썼다. 그런데 높은 평가를 얻었던 이전 기사들과 달리 흑인 분장은 큰 비판을 받았다. 흑인 작가이자 기자인 노아 소는 “발라프는 약자를 흉내 내 돈을 벌고 존경까지 얻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목적이 정당해도 수단이 나쁘면 안 된다는 건데, 비교할 사례가 있다. 미국의 백인 기자 존 하워드 그리핀은 발라프보다 50년 이른 1959년에 온몸을 검게 물들여 흑인으로 분장하고는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 남부를 6주 동안 여행한다. 그 과정에서 당한 차별을 쓴 책이 〈블랙 라이크 미(Black like me)〉다. 이 책은 미국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고, 블랙페이싱이라는 수단 때문에 비난을 받지도 않았다.

인종차별이 나쁜 기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저마다 다른 개인을 하나로 뭉뚱그려 범주화·일반화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블랙페이싱도 그렇다. 흑인을 한데 묶어 차별하는 것도 모자라 백인 스스로 흑인으로 분장해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하면서 차별이 정당하다는 생각을 강화한다. 범주화 중에서도 악랄한 범주화다. 하지만 블랙페이싱의 기원이나 의도는 단일하지 않다. 블랙페이싱은 비판의 대상이지만, 비판은 그것을 둘러싼 맥락, 의도, 반응을 고려해 이뤄져야 한다. 미국과 달리 유럽에서 블랙페이싱이 완전히 금기시되지 않고 여전히 논쟁 중인 이유다. 한국의 ‘관짝소년단’ 논란에서 아쉬웠던 건, 블랙페이싱이 잘못됐다는 주장 대부분이 미국 상황만을 근거 삼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아주 나쁜 거니 한국에서도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여러 건설적인 질문을 봉쇄했다.

차별 없는 사회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가 아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식으로 ‘정치적 올바름 5개년 계획’을 세워선 안 된다. 획일화된 기준을 세워 모두가 열심히 따르게 하는 건 분명 효율적이지만, 질문과 소수 의견은, 설사 그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해도 생략될 경우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경제개발계획 시대가 끝난 1990년대에 한국 경제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우리는 다 알고 있지 않나.

기자명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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