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지음, 햇빛출판사 펴냄, 1988년 초판

개정판이 있는데도 일부러 구판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왜 굳이 구판을 찾느냐고 따져 묻는다면 나도 뭐라 답하기가 어렵다. 어떤 책을 꼭 갖고 싶은 이유에 관해 말하자면 세상에 있는 책의 숫자만큼 또 다른 책이 필요할 것이다. 보르헤스가 말한 ‘바벨의 도서관’은 바로 이런 식으로 무한히 증식하는 우주가 아닐까? 책의 우주! 그리고 그곳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절판된 책
한 권….

나보다 대여섯 살 더 들어 보이는 외모의 이 손님은 한참 동안 우리 책방 이곳저곳을 둘러본 다음 차분한 목소리로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 이름을 먼저 말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찾고 있는데 꼭 초판을 구해서 읽고 싶다는 거다.

“왜 초판을 찾으시나요? 나중에 돌베개출판사에서 개정판이 나왔는데요.”

그 책은 초판이 크게 의미가 없다. 초판의 내용이 개정판에 전부 수록됐을 뿐 아니라 초판에 없던 ‘청구회 추억’ 부분이 개정판에는 들어가 있다. 개정판보다 분량이 더 적은 책을 일부러 찾을 때는 분명히 이유가 있지 않을까?

“1988년이지요, 햇빛출판사 초판이….” 손님은 말끝을 흐렸다.

그는 초판이 나왔던 당시 대학생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대학생이라고 해도 전부 운동권은 아니었습니다. 저처럼 소극적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친구들이 데모할 때 도서관에서 공부했습니다. 친구들이 학사징계 받고 수업을 다시 들어야 했을 때 저는 졸업해서 취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별 탈 없이 잘 살아왔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게 책을 찾는 이유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데모하지 않았다고 해서 잘못 산 것도 아니고.

“그때 한 친구가 저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했거든요. 책을 준 건 아니고 제목만 알려줬어요. 어쩐지 기분 나쁜 제목이라 한 귀로 흘려듣고는 안 읽었습니다. 그 친구가 누구였는지도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네요. 한동안 친하게 지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저에게는 친구라는 게 없습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친구를 사귈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회사에서 만난 사람은 친구라기보다는 동료라고 해야겠지요. 저는 친구가 없습니다. 그런 생각이 가끔 저를 슬프게 합니다. 나중에 친구가 권해줬던 그 책을 찾아보니 이미 절판됐고 개정판이 나왔더군요. 어쩔 수 없이 그걸 사서 읽었지만, 그건 친구가 권해준 책이 아니잖아요?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때 친구가 권했던 바로 그 책을 읽고 싶은 겁니다.”

저 가방 속에 든 작은 책의 의미

수십 년 전에 펴낸 책이지만 지금 다시 그 책을 찾는 게 생각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당시에 워낙 많이 팔렸기 때문일까. 그 책은 여전히 어느 동네 헌책방에서 문득 눈에 띄곤 한다. 두어 달 지난 다음 책을 찾아드렸고 손님은 다시 그 특유의 침착한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책방 문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가 찾던 책 한 권이 과연 어떤 의미였을지 상상해보았다. 저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작은 책은 책이 아니라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는 잊힌 친구다. 젊은 시절 막연하게 꿈꾸었던 세상이며, 우주로 향해 나 있던 작은 창문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바벨이라는 거창한 이름은 붙일 수 없더라도 그만의 친구를 얻게 되었으니 한동안 슬픈 생각은 떨쳐버릴 수 있기를 바란다.

기자명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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