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윤 제공

스물네 살 이후로, 이렇게 한국에 오래 머물러보긴 처음이다. 가장 괴로운 점 중 하나는 자려고 누우면 불현듯 취재지의 몇몇 ‘최애’ 음식이 떠오른다는 점이다. 늘 군침을 삼켜야 한다.

오키나와 중부 아와세라는 조그만 항구에 아지토야(あじとや)라는 식당이 있다. 2014년이었나? 여느 날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오키나와를 누비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오키나와 날씨는 변화무쌍해서 어떤 날씨 앱도 무용지물이다. 여행작가는 이런 날 취재 예정인 식당 여러 곳을 방문해 진탕 먹기라도 해야 하루 공치지 않는다. 이날 내가 있던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취재 예정 식당이 아지토야였다.

수프카레는 원래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의 삿포로에서 탄생한 음식이다. 아잔타라는 카페에서 처음 생겼다고 한다. 영국을 통해 일본으로 전파된 카레(커리)의 핵심은 적당량의 전분이 가미된 걸쭉함이다. 하지만 수프카레는 말 그대로 카레 탕을 떠먹는 느낌이다. 이리 된 이유를 아잔타의 주방장에게 물어봤지만 신통한 대답은 얻지 못했다. 과거 아잔타의 노주인이 인터뷰한 내용을 찾아보니 카레와 한국의 탕, 그리고 중국의 약선 요리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어낸 요리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삿포로의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 먹고 나면 몸이 뜨끈해지는 탕 요리가 필요했단다.

수프카레는 이후 스리랑카 교와코쿠(スリランカ狂我國)와 기타로(木多郎)라는 식당이 인기를 끌며 또 한번 변화한다. 특히 스리랑카 교와코쿠는 말 그대로 스리랑카 스타일 카레집인데, 이 집으로 인해 수프카레는 스리랑카 카레가루로 만들어야 제맛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냈다.

스리랑카 카레는 인도 카레와 달리 양파와 토마토 퓨레를 사용하지 않고, 맹물 혹은 코코넛밀크에 스파이시를 배합해 만들기 때문에 무척 묽다. 인도를 먼저 여행하고 스리랑카를 여행한지라 처음에는 이런 묽은 카레를 낮추어봤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스리랑카 홍차 산지이자 고산지대인 누와라 엘리야에서 소나기를 흠뻑 맞고 덜덜 떨면서 스리랑카 카레를 먹은 이후로 그 매력을 알게 됐다. 인도에는 왜 국물 요리가 없느냐며 투덜대던 내게 일종의 구원이었다.

일본 최북단 사람들이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한국의 탕과 중국의 약선 요리를 참고해 만든 수프카레는, 결국 스리랑카 카레를 만나며 조리법이 자리 잡았다. 나는 채소와 함께 함박스테이크 한 덩이를 추가한 수프카레를 선호한다. 일본을 여행하면서 그 지역에서 나는 계절 채소를 얼큰한 카레 국물과 함께 떠먹는 건 즐거운 일이다. 지역의 채소들이 더해지며 수프카레는 독특한 지역색을 띠게 되었다.

남은 식당 방문을 끝내버린 음식

오키나와의 아지토야도 이런 공식에 충실하다. 이 집은 오키나와 특산물인 흑당을 쓴다. 수프카레와 흑당의 조합이라니, 먹어보기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수저를 들어 매콤하고 시원한 국물을 후루룩 마시면 흑당 특유의 묵직한 향과 은은한 단맛이 뒤이어 따라온다. 이건 흑당이 아니면 낼 수 없는 단맛이다. 이윽고 젓가락으로 오키나와의 대표 채소인 고야(여주)를 집어 함께 씹으며 단맛과 쓴맛의 조화를 느낀다.

이 한 그릇에 대체 몇 개 나라가 들어 있는지 가늠하노라면 다시금 입안에서 군침이 돈다. 이 집은 밥이 무제한이다. 조금만 먹고 다른 식당을 가야 하건만 이날은 이 집에서 취재를 끝냈다. 가끔은 허리띠 풀고 온전히 먹는 일에 집중해야 여행작가 일을 오래 할 수 있는 법이다.

기자명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