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나의 씨를 세상에 남기고 싶어.” 결혼과 출산을 강력하게 희망하는 남성 친구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었다. 너무 솔직해서 당황했지만 이해는 되었다. 인류 역사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신의 명령을 따라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애쓴 역사이기도 하니까. 가부장 사회에서 대를 이어야 하는 남성이 ‘씨’를 남기는 게 과업인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과 닮은 인간을 세상에 남기고 싶은 욕망이 어디 남성에게만 있겠는가. 그 욕망은 여성의 것이기도 하다. ‘성씨’도 마찬가지다. 여성에게도 자신의 성을 물려주고 싶은 욕망이 있다. 아버지의 성을 물려주는 게 사회규범인 것 같지만, 그 규범은 당연한 게 아니다.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되어 2008년부터 시행된 새 가족법에 따르면 불법도 아니다.

후배 A는 자신의 성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평범한 여성이었다. 남편과도 합의를 마쳤다. 동사무소에 혼인신고를 하러 간 날, 혼인신고서 4번 조항에 ‘예’라고 체크했다. “자녀의 성·본을 모의 성·본으로 하는 협의를 하였습니까?” 그러자 문제가 생겼다. ‘예’라고 답할 경우 ‘합의서’를 작성해야 했다. 아버지의 성을 물려줄 때는 작성하지 않아도 되는 불필요한 절차였다. 구청 직원의 태도도 뜻밖이었다. “잘못 쓰셨다”라며 다시 확인할 것을 요구했다. 다른 여성 B도 비슷한 경험을 해야 했다. 구청 직원이 재차 묻더니 합의서를 어디 두었는지 찾지 못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법으로 보장된 일이지만 실제 적용하기에는 관습의 문턱이 높았다.

혼인신고를 할 때 아버지의 성을 물려주기로 했다가 나중에 변경할 경우는 어떨까? 외국인이거나, 아버지를 알 수 없는 경우이거나, 혼인 외 출생자이거나, 이혼·재혼으로 가족 형태가 달라지는 등 제한된 경우만 예외적으로 법원의 허가를 받을 수 있다. 즉, 내가 ‘오’씨에서 어머니의 성인 ‘유’씨로 변경하기 위해서는 부모님이 이혼한 후 재혼해야 가능하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다 성인이 되어 변경하고자 해도 불가능하다.

지난 5월, 법무부 산하 ‘포용적 가족 문화를 위한 법제개선위원회(법제위)’는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 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라고 명시한 민법 제781조를 변경할 것을 권고했다. △‘부성주의 원칙’에서 ‘부부 간 협의 원칙’으로 △자녀의 성·본을 혼인신고할 때 정하되, 출생신고할 때 변경할 수 있도록 △일정 연령 이상의 자녀 본인이 원할 경우 변경이 가능하도록 절차를 마련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국민 다수가 원하는 ‘새로운 원칙’

이런 권고가 나온 것이 반가우면서도 ‘호주제가 폐지된 게 언제인데…’라는 마음도 생긴다. 권고 사항은 여전히 미흡한 부분이 많다. 불필요한 과정을 없애고 출생신고할 때 결정하게 하면 어떨까? 인식 개선도 시급하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그동안 아버지의 성과 다른 사람을 만나면 이상하게 여겨왔다. 심지어 A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이런 제도가 있는지 몰랐다. 그만큼 편견은 뿌리 깊고 제도와 일상의 거리는 멀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선택을 ‘예외적 상황’이나 ‘특수한 경우’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최근 ‘자녀에게 엄마 성을 줄 수 있는 권리도 동등하게 보장해주세요’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게시되었다. “평등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새로운 원칙으로”라는 대목이 눈에 띄었다. 지난 6월,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가족 다양성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 내용 중 ‘자녀의 출생신고 시에 부모가 협의하여 성과 본을 정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것’에 응답자의 73.1%가 찬성했다. 다수의 국민이 ‘새로운 원칙’을 원하는 것이다. 이미 늦었다. 이 새로운 원칙이 실현되는 걸 보고 싶다.

기자명 오수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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