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닉슨 대통령의 미디어 보좌관이었고, 레이건 대통령과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대선 캠페인을 이끌었으며, 아들 부시 대통령의 정치 컨설턴트로 활약했다. 1996년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과 함께 케이블 채널 ‘폭스뉴스’를 공동설립한 뒤 최고경영자로 20년 동안 군림했다. 그는 힘이 센 사람이었고 발이 넓은 사람이었으며 운이 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니 다행스럽게도(!) 끝이 좋은 사람은 되지 못했다.

영화 〈밤쉘: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은 폭스뉴스 회장 로저 에일스(존 리스고)의 절대왕정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여성들 이야기다. 그 한순간을 만들어내기까지 그들 삶에서 무너져내린 무수한 순간들의 기록이다. 침묵과 방조로 지어올린 가해자의 요새를 증언과 연대의 파도로 허물어버린 사람들의 실화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왜 당할 때는 가만있다가 이제 와서?”라고 시비 거는 자들을 입 닫게 만드는, 아주 잘 정리된 ‘직장 내 성희롱 백서’다.

시작은 그레천 칼슨(니콜 키드먼)의 고소장이었다. 10년 넘게 폭스뉴스 간판 진행자로 일하다 해고되면서 로저의 지속적인 성희롱과 성추행을 폭로했다. 비슷한 사건을 수도 없이 맡아온 변호사가 만류한다. 이번에도 혼자 싸우다 지칠 거라고. 그레천은 확신한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누군가는 함께 나서줄 거라고. 그렇게 바통이 동료 앵커 메긴 켈리(샤를리즈 테론)에게 넘어갔다.

침묵하면 나는 산다. 모른 척하면 나는 계속 일할 수 있다. 하지만 침묵하면 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가 모른 척하면 그도 모른 척, 또 다른 여성을 피해자로 만들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메긴이 여전히 망설이는 이유.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침묵을 깬 대가로 내가 얼마나 많은 걸 잃게 될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성희롱 피해자가 된다는 것

“직장 내 성희롱의 피해자가 된다는 건 이런 겁니다. 당신을 질문의 늪에 빠트리죠. 끊임없이 자문하게 만듭니다. 내가 무슨 말을 했지? 무슨 옷을 입었지? 내가 여지를 줬나? 내가 돈을 노리고 그랬다고 소문이 날까? 유난 떤다고 하지 않을까? 평생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할까? 이 회사에 남는다면 이 모든 걸 내가 참고 견딜 수 있을까? 다음 직장이라고… 다를까?”

세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 케일라 포스피실(마고 로비)의 입을 빌려 영화가 들려준 이야기. 간신히 빠져나온 그 늪으로 피해자를 다시 밀어 넣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이 대사를 오래오래 기억하기로 한다. 여성 관객은 다 알아채는데 나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 영화 속 디테일과 뉘앙스의 목록을 SNS에서 채집하면서, 정희진 선생의 이 말을 다시 가슴 깊이 새겨두기로 한다. “가장 무섭고 해결하기 어려운 권력은, ‘몰라도 되는 권력’이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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