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해양박물관 제공어류학자 정문기는 수산 연구와 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가 1977년 한글 번역·해설판을 완성하면서 누구나 〈자산어보〉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아내의 할아버지는 남해공립수산실수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에 정착해 일가를 이루었다. 할아버지 자택은 영도의 남항 바로 뒤에 있었는데, 1980년대에 소금창고와 조그만 ‘점빵’을 할머니가 운영하면서 남부럽지 않은 살림살이를 꾸렸다. 할머니의 소금창고업은 1979년 한주소금이 등장하면서 제염공장과 더불어 쇠락해갔지만, 할머니 수완이 없었다면 5남매 자식들의 공부나 결혼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해방 이후 할아버지가 영도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부산수산검사소’에 근무했기 때문이다. 과거 정부기구에 근무한 이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 〈대한민국 직원록〉에는 할아버지가 1952년에도 근무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당시 검사소의 소장이 바로 ‘한국 어류학의 태두’ ‘수산학의 거목’이라 불리는 정문기(1898~1995)였다. 그가 한국의 수산정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생각하면, 할아버지의 사소한 기록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있었을 것이다. 올해 초 할아버지의 자택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 옛날 사진이나 기록은 이제 찾을 길이 없다.

정문기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벌어질 당시 수산검사소는 ‘한가해서, 미루어둔 자료를 정리할 수 있었던’ 직장이었다. 전쟁 와중의 한국은 수산물 수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곳의 업무는 과중한 편이 아니었다. 정문기는 전쟁 통에 잃어버렸던 자신의 노트 60권과 장서를 우연히 고물상에서 발견하게 됐고, 부산수산검사소 한쪽에서 집필에 들어간다. 그렇게 나온 책이 한국 어류 823종을 종합한 〈한국어보〉(상공부, 1954)다. 우리말로 쓰인 최초의 어류학 서적이다.

어류학자 정문기가 1977년 한글 번역·해설판을 완성하면서 누구나 〈자산어보〉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정문기는 자신의 생애에 관한 회고를 여러 차례 남겨두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 가운데 하나는 학력 이동 과정에 대한 부분이다. 1898년 순천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순천보통학교에 입학해 졸업한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가 세운 2년제 고등소학교였던 은성학교(현 매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 경신학교 3학년으로 편입한다. 미국인 선교사가 교장이었던 경신학교 4학년 때 동맹 휴학을 하면서 4학년 전체가 김성수가 교장으로 있던 중앙학교로 옮겨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 메이지 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다가, 와세다 대학 부설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재수를 한 끝에 마쓰야마(松山) 고교에 입학한다. 그런 다음 규슈 제국대학 공과대 응용학과에 입학했다가, 이후 재수를 택해 도쿄 제국대학 수산과에 들어가 1929년 졸업한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정문기의 삶

30대 초반까지 이루어진 긴 학력 이동 과정은 식민지와 제국의 학력 위계와 입신 출세주의의 경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정문기의 어류학과 수산사, 어업사에 관한 연구와 조사가 무리 없이 이루어진 데에는 도쿄 제국대학 출신이라는 점이 큰 영향을 미쳤다. 1930년 조선총독부 수산과 양식계장 기수로 취업할 수 있었던 것은 도쿄 제국대학의 총장이었던 야마카와 겐지로의 추천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 총독부 정책이 조선인에게 기사(技師) 직을 보장하지 않았고 그보다 아래 직급인 기수(技手) 직만을 주었는데, 업무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총독부로부터 ‘군수’ 자리까지 제의받기에 이른다. 도쿄 제국대학 출신에 대한 파격적 대우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는 연구자의 길을 택하겠다며 군수 제의를 일관되게 거부한 것으로 회고한다.

어린 시절 총독부 학무국장 세키야 데이자부로가 순천에 시찰을 와서 “사람이 훌륭히 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공부는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된다”라고 한 말을 평생 잊지 못했다는 진술이나, 중앙학교 시절 인촌 김성수로부터 들은, ‘지금 유행하는 학문이 아니라 5~10년 뒤 유행할 새로운 학문에 대한 시야를 가져야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는 논리를 깊이 각인했다는 회고는 정문기의 학력과 지식 편력이 갖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총독부가 기사 직을 주지 않는 것을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엄청난 ‘차별’로 이해하고 있었음에도, 총독부 학무국장의 말 한마디를 뼈에 사무치게 새겨듣는 이중화된 과정이야말로 식민지 지식인의 분열된 상태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정문기의 학력과 근무 이력의 저변에는 ‘스포츠’도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정문기는 1960년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취임했는데, 그의 회고담에 야구·축구·럭비와 관련된 이야기가 반복된다. 가령 메이지 학원 야구부에서 활동하며 일본어를 익혔던 과정이나, 도쿄 제국대학 재학 때 야마카와 총장의 후의를 입어 럭비부 활동을 했던 것은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학력 네트워크뿐만 아니라 운동 또한 그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잡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된 것이다. 스포츠가 당시 학력만큼 중요했던 까닭 가운데 이런 대목도 있었다. “(정문기의 일본 유학 시절) 일본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이 학생들에게 만연했는데, 일본 정부에서 조사해보니 운동선수들은 사회주의에 물든 학생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 당국에서는 국가 시책으로 대학생에게 스포츠를 적극 장려하라는 방침이 세워졌다는 것이었다(〈과학과 기술〉, ‘원로 과학기술자의 증언-수산자원 보호 위한 부루벨트 설정돼야’, 1982).”

일본 유학을 마친 정문기는 조선에 돌아오자마자 한반도 연안의 수산자원에 대한 기록을 정리한다. 이를 집대성해 초기 연구작인 〈조선명태어〉를 발표한다. 일본어로 쓰인 이 논문은 명태의 어원에서부터 영양 가치, 생태환경, 어로, 어획고, 가공 방식, 명란 제조, 유통, 수출입 상황에 이르기까지 명태에 관한 거의 모든 영역을 다루고 있다.

식민지 지배자들에게 명태는 각별했다. 명태는 오래전부터 조선인들에게 단백질과 유산균을 한꺼번에 제공받을 수 있는 저렴한 일상적 음식이자 제사에 사용되는 제물이었다. 일본인 어업자들로서는 소비자가 확실히 준비되어 있는 수익 사업이었다. 기선저인망어업에 대한 허가를 조선인에게는 한 도에 한 명 정도밖에 내주지 않아서, 명태 어획고 대부분은 일본인 어업자들의 몫이었다. 명태 어업이 불황이라는 소식이 들릴 때 곤경에 빠지는 것은 오히려 일본인 어업자들이었다.

명태 연구가 활발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명태와 관련한 제조업에 대한 보고가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 정문기는 각 지방 수산시험장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활용해 명태에 관한 통계를 추출하고 정리해나갔다. 여기에는 조선인 어업자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들어 있지 않다. 당대의 일본인 연구자들조차 어류 연구를 진행할 때, 그 지역의 문화와 사람들을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정문기의 연구에서는 일종의 문화사적 검토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예컨대 총독부 수산시험장 기사였던 우치다 게이타로의 연구 자료에는 비록 그 연구가 식민 지배와 착취의 수단으로 전유되었지만, 조선의 생태환경에서부터 풍속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현장이 서술되었다.

ⓒ국립해양박물관 제공1958년 홍진기 해무청장 이임식에 참석한 정문기(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정문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1977년 〈한국어도보〉를 출간할 때 우치다가 남겨둔 자료를 많은 부분 활용했음에도, 우치다로부터 사용을 허락받았다는 말 외에 구체적인 인용 표시는 물론이고 조선인의 어업 기술에 관한 많은 부분을 누락한 채로 발간했다. 당초 우치다의 자료 수집에 기여했던 조선인의 자리마저 지우고 만 셈이다. 정문기의 연구에서 조선인의 자리가 딱 한 번 채워진 적이 있었다. 제주에서 ‘행어’라 불리는 생선이 멸치임을 알려준 이가 제주 모슬포에 사는 한 노인이었다는 것뿐이다.

정문기는 해방을 목포수산시험장에서 맞는다. 그의 표현대로 하면 ‘해방 정세를 관망’했다. 해방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형식적으로라도 기쁨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바라본 것은 식민지 지식인이 해방에 대해 갖는 양가적 태도를 의미한다. 얼마 뒤 하지 사령관의 부탁으로 미군정의 수산고문을 맡으면서 정문기는 관망에서 벗어난다. 적산을 처리하고, 중앙수산시험장의 장을 맡고, 김성수의 요청으로 부산수산대학 학장까지 겸직하면서 해방 정국을 무난히 혹은 화려하게 통과한다.

수산자원 고갈 문제 등에도 꾸준히 관심

그는 이승만 정부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다. 1949년 정부 수립 이후 전남 강진에 난류를 따라온 거북이 한 마리를 두고 소란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크기가 2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거북이가 잡혔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국내 언론에 연일 대서특필되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 거북이를 서울 경무대나 창경궁에서 기를 작정까지 하고 있었다. 이때 이 대통령의 부탁으로 강진에 직접 내려가 이 거북이가 ‘푸른 바다거북(청해구)’임을 밝히고 세계 최대 운운이 낭설임을 확인한 것도 정문기였다. 정문기는 “당시 강진에는 거북이가 나타났다고 하니 이는 이 전 대통령의 등극을 축하하는 길조라고 사람들이 아첨했다”라고 비꼬았지만, 그 또한 이 거북이에게 ‘서구(瑞龜:상서로운 거북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후 주로 학계에 몸담으면서 수산· 어류학 분야에서 정문기가 이룬 연구는 독보적이다. 특히 고문헌에 대한 검토는 정문기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고, 해방 이후의 수산사와 어업사 서술에서도 그에게 빚진 바가 크다. 가령 1977년 정약전의 〈자산어보〉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출간된 것도 그가 〈자산어보〉에 대한 한글 번역·해설판을 완성했기에 가능했다. ‘농촌부업에 좋은 도답양부법’과 같은 농촌의 민물고기 양식 사업 제안, 수산자원 고갈 문제에 대한 꾸준한 관심은 지금 보아도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일제 말기까지 남아돌아서 군함의 기름이나 글리세린을 정제하는 데까지 활용되었던 정어리의 남획과 고갈 문제 역시 꾸준히 경고해왔다.

미군정 기간에 일본인들이 한반도 연안의 수산물을 확보하려던 계획을 미군정 수산고문으로서 단호하게 차단한 것, 1949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인도태평양수산회의의 한국 대표로 참가해 한국의 수산정책과 부흥을 국제적인 지평으로 확장한 것은 그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어시장 판매고 일부를 떼어 부산수산대학 기숙사 기금을 조성하는 등 한국 수산 연구와 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것도 조명되어 마땅하다. 〈한국 어업사〉 〈한반도 연해 포경사〉 같은 저작을 쓴 박구병, ‘귀신고래’라는 학명을 국제적으로 만들어낸 전찬일과 같은 후속 연구자가 그가 세운 기반으로부터 등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그가 한국 수산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면, 그에 대한 기억과 기록 역시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에 관한 자료는 이런저런 단편적 인터뷰에 그치거나 ‘이베이’나 인터넷 헌책방에서 고가로 거래되는 지경이니, 할아버지의 집에 있었을지 모르는 기록들이 내내 마음에 걸릴 뿐이다.

기자명 김만석 (독립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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