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가야 스에지가 노동운동을 한 일제강점기 시절의 조선질소비료공장(흥남 비료공장) 전경.

일제강점기, 일제에 항거하는 조선인들은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 불렸다. 일본말로는 ‘후테이센징’. 불령은 ‘원한과 불만을 품고서 제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뜻이니 식민지 백성 노릇을 거부하는 조선인들을 두루 일컬은 소리겠지.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비국민’, 일본말로 ‘히코쿠민’이라는 단어도 많이 쓰였어. ‘국민이 아닌 자’라는 뜻이지. 일본 제국주의의 시책에 반대하거나 그에 적극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호칭을 붙이고 불이익을 주었단다. 일제 당국이 “조선에 사는 60만 내지인(일본인) 가운데 유일한 비국민”이라며 이를 박박 갈았던 사람이 있어. 이소가야 스에지(1907~1997)라는 사람이야.

일본 시즈오카현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형제 10여 명 중 막내였던 이소가야는 일용 노동자로 호구지책을 삼으면서도 글을 깨치고 문학 서적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책을 독파한 청년이었어. 일본의 대륙 침략 야욕이 무르익어가던 1928년 그는 군에 입대해서 일본군 조선 주둔군 19사단에 배속받았지. 최근 개봉된 영화 〈봉오동 전투〉에 등장하는 일본군들이 이 19사단 병력이란다.

어느 날 이소가야 스에지는 행군 중에 물을 얻어 마시면서 한 조선인 가족의 따뜻한 호의를 경험하고 인연을 맺게 돼. 제대한 이후 조선인들과 함께 과수원을 가꿔보리라 마음먹은 그는 과수원을 차릴 돈을 벌기 위해 함경남도 흥남의 비료공장에 취직했어.

흥남 비료공장은 동양 최대 비료공장으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동시에 참혹한 작업환경으로 악명을 떨친 곳이기도 해. 이소가야 본인의 회고야. “고막이 터질 듯이 쾅쾅대는 광석 분쇄기와 자욱한 분진, 용광로 속의 타고 남은 찌꺼기에서 나는 코를 찌르는 냄새 등. 그곳에서는 유산(황산)이 주르르 떨어지는 옷을 입고, 일고여덟 겹으로 접은 타월로 입과 코를 막은 일본인과 조선인 노동자가 주야 3교대로 일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살인 공장이라고 불렀다(이소가야 스에지, 〈우리 청춘의 조선〉).”

여느 일본인과 달리 조선 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내던 그에게 접근하는 공장 동료들이 있었어. 주선규·송성관 등 조선인 노동운동가였지. 이소가야 스에지는 조선인 동료들과 대화와 토론을 통해 열렬한 노동운동가로 거듭나게 돼. 그 스스로 “다시 태어났다”라고 할 만큼. 과수원을 함께 하자고 약속한 조선인 가족과는 인연을 끊었지. 그들의 안전을 우려한 배려였어. 그는 자신을 친절히 대해준 조선인 가족에게 작별의 편지를 남겼다. “당신들 앞에서 사라지려고 하는 나를 용서해주기 바랍니다. (···) 조선 사람들이 새로운 조국을 세우고 동포 모두 서로 화목하고 친밀해질 날을 나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반드시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이소가야가 노동운동에 뛰어든 1930년대 초반은 1929년에 터진 미국발 경제 대공황이 세계를 휩쓸 무렵이었어.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열악해지고 생존을 위한 파업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는데, 이를 주도한 건 ‘혁명적 노동조합’을 내세운 좌익들이었다. 특히 함흥과 흥남 일원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과 쌍벽을 이룬다고 할 만큼 좌익세가 강한 지역이었어. 이소가야 스에지는 조직 내부의 일본인 지부 책임자로 활동했다.

1932년 5월1일 메이데이 시위를 준비하던 중 조직이 드러났고 노동운동가 500여 명이 체포되었지. 이걸 역사에서는 ‘2차 태평양 노동조합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소가야 스에지도 체포됐는데, 그를 잡아넣은 자가 조선인 형사였다는구나. 조선인 경찰이 일본인 조선 독립운동가(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은 당연히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목표로 했으니까)를 체포한 셈이야.

ⓒ국사편찬위원회 전자도서관이소가야 스에지의 서울 서대문형무소 수형 카드.

독립운동가들과 뜨거운 ‘동지애’ 나눠

일본 경찰이고 검사들이고 이 별종 일본인 앞에서 황망할 뿐이었어. “어떻게 일본인이 조센징하고 어깨걸이를 하고 동지가 된단 말이냐?” 그들은 이렇게 선언한다. “너는 조선에 있는 60만 내지인 가운데 유일한 비국민이야!” 이 비국민에게 일제 당국은 10년의 징역살이를 선고하지. 이소가야는 감옥에서도 조선인 혁명가, 독립운동가들과 뜨거운 동지애를 나눈다. 그가 간도 공산당 사건의 사형수였던 이동선과 감옥에서 나눈 대화는 수십 년 뒤에 읽어도 가슴이 더워지지.

“친애하는 동지여, 건강하십니까. 이번 운동에 나오면 내 셔츠와 동지의 것을 교환하고자 합니다. 운동할 때 내 셔츠를 동지의 운동장 담에 걸어두겠습니다. 동지의 것도 같은 곳에 걸어둬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동지의 것을 입겠습니다. 동지도 알고 있듯이 우리들은 그다지 멀지 않은 장래에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럼 동지여, 부디 안녕히. 이동선.”

“친애하는 동지여, 후의에 충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발 내 일은 걱정하지 말아주십시오. 동지의 친절만으로 내 가슴은 벅찹니다. 본래 나야말로 동지에게 뭔가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만 유감스럽게도 현재 나에게는 무엇 하나 가진 게 없습니다. 이소가야.”

1936년 7월20일 이동선을 포함해 간도 공산당 관련자 22명이 사형대에 오르던 날 이소가야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맛보았다고 회고하고 있어. 빼앗긴 나라를 찾고 핍박받는 동포를 제국주의로부터 구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던 조선인들과 그들을 이해하고 연대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일본인은 그렇게 생과 사가 갈렸다. 조선인 동지 상당수가 전향을 택해 출옥할 때에도 이소가야는 끝까지 전향하지 않았고 전향한 동지들을 비난하지도 않았어. 오히려 그들이 받은 고통을 가슴 아파했지.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이 왔어. 이소가야 스에지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일본인을 포로 취급하는 와중에 옛 동지인 주선규 등의 도움을 받아 일본인들의 안전 귀환을 위해 노력한다. 그 자신도 1947년 일본으로 돌아갔지. 이후 이소가야는 소학교 수위 일을 하면서 도드라지지 않는 여생을 살았어. 그러면서도 조선과 한국, 갈라진 한반도에 대한 애정을 거두지 않았고 일본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반성을 평생 촉구했단다.

1991년 4월 그는 한국을 방문해 수십 년 전 목숨을 걸고 함께했던 동지들의 흔적이 역력한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찾았어. 일제강점기 이래 사형장이 보존돼 있었으니 그때도 그는 이동선을 비롯한 동지들이 떠났던 사형장을 돌아보았을 거야. 그는 이렇게 말했어. “일본은 내각이 교체됐다. 신임 총리대신과 외무대신 등이 일본이 한국 국민에게 행한 죄를 속죄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죽은 자에 대한 사과의 말과 위령도, 또한 작년에 크게 문제가 된 ‘위안부’ 보상 문제도 ‘모두 이미 해결이 끝난 문제’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곳에서 처형당한 사람들의 위령을 위해, 외무성에 진정을 속할 생각이다. 내 힘으로 이루지 못하거든 여기에 관심 있는 일본인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받고 싶다(〈역사비평〉, ‘식민자 사상범과 조선: 이소가야 스에지 다시 읽기’, 2015).”

아빠는 네게 단지 ‘한국을 사랑한 특별한 일본인’ 이소가야 스에지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 건 아니야. 한국인이고 일본인이고 아빠는 사람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한 인간으로서 고통받는 이들을 이해하고 손을 맞잡고 어깨를 결었던 훌륭한 인류 중의 하나를 소개해주고픈 거란다. 한·일 간의 가파르고 험악한 현대사 속에서, 일본인 이소가야 스에지를 기억해주기 바란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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