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동반자법(생활동반자 관계에 관한 법률)’은 혼인이나 혈연이 아닌 사이에서도 서로 돌보며 함께 살아가기로 법적으로 약정한다면, 일정한 대리권과 복지 혜택을 부여하자는 내용이다. 비혼과 이혼의 증가, 고령화 등으로 전통적인 가족관계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미 많다. 이 때문에 돌봄 공백의 문제가 커지고 있으며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전통적인 가족관계가 아니어도 어떻게든 서로 돌보며 살아가도록 법과 제도로 지원할 수는 없을까.

정부의 모든 행정 업무는 업무 대상이 누구이고 무엇인가 테두리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가족 행정은 당연히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행정 업무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 무엇인지 자체가 논쟁적이란 점이다. 여성가족부는 자신들의 업무 영역을 ‘민법상 가족’, 즉 혼인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에 한정하고 있다. 가족 행정의 기본법인 건강가정기본법상 가족도 민법상 가족이다. 이에 따라 한부모가족·다문화가족 등은 정부의 업무 영역이지만 동거 가구나 동성애 가족은 정부의 업무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정켈 그림

이를테면 박근혜 정부는 민법상 가족 외의 가족을 인정하지 않았다. “가족 실태조사에 다양한 법외 동거 가구 조사를 포함해야 한다”라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의 문제 제기에 대해 당시 김희정 여성가족부 장관은 이렇게 답했다. “여성가족부의 업무 영역은 민법상 가족에 한정되기 때문에 동거 가구에 대한 조사는 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는 어떤가. 역시 가족 행정의 대상이 되는 ‘가족이 무엇인가’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다양한 가족 지원’을 업무 목표로 제시했는데, 여기서의 다양성이 민법 틀 안에서의 다양성인지, 민법의 틀을 벗어나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정 장관은 동거 가구 등에 대해 기초적 실태조사를 추진했지만 여러 제약에 부딪힌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법과 가족 행정의 지체

가족 정책은 국민의 행복 증진과 인구재생산을 통한 사회 유지, 두 가지를 기본 목적으로 한다. 그 가족 정책이 근본적인 도전을 받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가족 정책이 처한 도전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는지 의문이다. 여성들은 가부장제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싫다며 결혼과 출산을 통한 ‘정상가족’ 구성을 사실상 거부한다. 돈 1억~2억원이 부족해서 결혼을 안 하고 애를 안 낳는 게 아니다. 지금 ‘허락된’ 방식으로는 같이 살기가 싫은 거다. 반면 남성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성역할을 포기할 생각이 별로 없다. 평생 한 사람과의 혼인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엔 수명도 너무 길다. 전통적 결혼의 범주를 넓히라는 동성 결혼 요구, 혈연관계의 속박에서 풀어달라는 부양의무제 폐지 요구 등은 전통적인 가족법과 가족 행정이 안팎에서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가족은 활화산이다. 펄펄 끓으며 녹아내리는 ‘가족’을 정부는 어떻게 다뤄야 할까. 전통적 가족제도는 녹아내리고 있는데 아직 어떤 지형으로 굳어질지 알 수 없다. 일단 국민 행복에만 집중하자. 어떤 관계든 같이 사는 게 행복하다는 사람들이 있다면 지원하고 응원하자. 저출산, 돌봄 공백과 사회복지 비용 증대, 고독사는 가족법과 가족 행정의 지체가 만들어낸 위기 증상이다. ‘민법상 가족’만 인정하는 가족 정책은 역설적으로 가족의 위기를 강화할 뿐이다.

기자명 황도윤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