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3일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느닷없이 한·미 FTA 협상 개시 선언을 한 뒤, 오랜 세월이 흘렀다. ‘투자자-국가 중재제도(ISDS)’는 그중에서도 핵심 쟁점이었고, 언제나 미국은 밀어붙이고 한국은 방어하는 양상을 띠었다.
대체로 미국에서 좌파는 이 제도가 환경·복지·노동 제도의 공공성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고, 우파는 미국 사법권의 훼손 때문에 반대했다. 민주당 대부분의 의원을 포함한 한국의 우파는 오로지 투자자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국 경제가 산다고 주장했다.
상전벽해의 대반전이 일어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의 투자 관련 챕터(11장과 19장)에 반대했다. 미국 기업의 해외 투자를 줄여서 국내 일자리를 늘려야 하기 때문이란다.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USTR) 신임 대표의 한마디가 간명하게 대변한다. “멕시코의 미국인 투자를 보호하는 조항이 어떻게 미국에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나프타에서 투자 챕터 전체가 빠질 가능성도 상당해 보인다. 지난 7월25일 한국 국회에서 열린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 개선’ 온라인 국제 세미나에 참석한 멜린다 루이스(미국, ‘글로벌 무역 감시를 위한 퍼블릭 시티즌’ 홍보책임자)는 라이트하이저가 사실상 ISDS를 제거한 협상안을 제출했다고 증언했다. 그뿐만 아니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한 것처럼 ISDS를 포함한 협상안은 앞으로 미국 의회를 통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한국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벨기에 투자보장협정에 기대 론스타 펀드가 47억 달러짜리 중재 요구(외환은행 주식 매각처분 승인 지연과 매각 차익에 대한 과세처분)를 한 이래, 한·미 FTA에 입각해서 엘리엇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을 문제 삼아 최소 7억7000만 달러의 배상을 요구했고, 메이슨 캐피털도 똑같은 이유로 1억7500만 달러를 요구했다.
줄을 잇고 있는 중재 요청에도 한국 정부는 문제없다며 큰소리쳤지만 급기야 패소 판정도 나왔다. 한국·이란 투자보장협정에 근거해서 이란의 엔텍합이 중재를 요청한 대우일렉트로닉스 사건에서 한국 정부는 패소했고 국민의 세금 730억원이 허공으로 날아가게 생겼다.
특히 엘리엇과 메이슨은 재벌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3세 승계를 위한 신종 수법들이 외국인 투자자라는 또 하나의 장벽을 넘어야 할 운명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미국이 ISDS 폐지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ISDS를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겠다는 것은 상황에 맞지 않는 판단(〈한·미 FTA 개정 협상과 한국의 대응 전략〉 보고서, 2018)’이라고 주장했다. 원래 재벌은 ISDS를 공기업과 공공서비스의 민영화를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강철 보검’쯤으로 여겼지만 그 칼날이 족벌 체제를 향하자 정반대로 태도를 바꾼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냉철한 판단이다.
투자자-국가 중재제도는 협상의 지렛대인가, 볼모인가
김현종은 무얼 하고 있는 걸까? ‘한·미 FTA의 ISDS 제도는 투자자 보호 및 국가의 규제권한 간에 균형을 이룬 발전된 형태로서… 우리의 법·제도와 조화를 이룬 여러 안전장치를 마련한’ 훌륭한 제도라는 게 정부의 공식 입장(산업통상자원부 ‘종합 의견’)이다. 김현종의 통상교섭본부는 “남소 방지 차원에서 한국 정부의 정책 권한을 계속 유지하면서 이행할 수 있도록 의견을 제시”했다. 그들은 미국이 이런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여서 놀랐다며 망외의 성과를 거둔 것처럼 굴었다.
과연 그럴까? 미국 무역대표부가 나프타를 교본 삼아 한·미 FTA에서도 투자 챕터를 사실상 제거하자고 요구했다면? 정부의 주장대로 ISDS를 협상의 지렛대로 농산물과 자동차에서 뭔가를 얻어낸 것이 아니고 정반대로 ISDS를 볼모로 잡혀서 농산물과 자동차를 더 많이 양보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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