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운(官運)이 좋아서 여러 직책을 두루 거치고 국회의원으로도 활약한 이에게 “경험한 자리 중 제일 좋은 데가 어디입니까?”라고 물었더니 “국회의원!”이라고 답했다는구나. 그에게는 직접 행정 일선에 나서는 공무원들보다 편하고, 국정 감사권을 쥐고 사법부와 행정부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아 ‘끗발 있는’ 자리였겠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건 아니야. 의정 활동 중에도 127건의 법안을 내고 34건을 통과시키거나 대안에 반영시켰던 고 노회찬 의원 같은 분도 있거든. 오늘부터 몇 주간은 그렇듯 국회에서 훌륭히 제 몫을 하며 깊은 발자취를 남긴 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해.
1948년 5월10일 제헌국회를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고, 국회의원 198명(투표가 이뤄지지 않은 제주도 2명 제외)이 선출됐어. 그 가운데 인천 을구에서 당선된 조봉암 의원도 있었지. 죽산 조봉암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하고 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까지 한 엘리트 공산주의자였어. 혹독한 감옥살이 속에 동상으로 손가락 마디를 잃으면서도 투쟁을 지속한 강골이었지.
하지만 해방 이후 그는 공산주의 운동을 지휘하던 박헌영과 각을 세웠고, 급기야 “현재 조선 인민은 공산당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계급에 의한 독재나 자본계급의 전제를 원하지 않는다”라는 선언으로 공산당과 공식 결별한단다. 그가 1948년 5·10 선거에 참여한 이유는 “가능한 지역에서 ‘우리의 독립정부’ 수립은 오히려 시급한 과제이며 통일정부 수립도 우리의 독립정부에 의해 제2단계로 모색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었지. 분단이 현실이라면 그를 수용하되 평화적인 통일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는 얘기였어.
당선 후 헌법 기초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조봉암은 헌법 내 인신보호 규정을 놓고 다른 의원들과 크게 충돌해. 인신보호 규정이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한 구속영장 제도, 구속적부심,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 등에 대한 조항들을 말하지. 원래는 “현행범인 경우에 한하여 영장 없이 체포가 가능하다”라는 예외 조항만 있었는데, 권승렬이라는 의원이 “범인의 도피 또는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을 때에도 사후 영장 청구로 대체할 수 있다”로 슬쩍 영장 없는 체포의 범위를 넓히더니, 김준연 의원은 “내우외환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의 경우에는 인신보호 관련 규정 일체의 적용을 법률로써 정지할 수 있다”라는 규정을 넣자고 우겼어. 그것도 모자라 ‘고문과 잔인한 형벌 금지’ 조항을 삭제하자는 얘기까지 나왔어.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을 경험하고 혹독한 옥살이 속에 동상으로 손가락 마디 일곱 개를 잃었던 조봉암은 여기에 격렬하게 반발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사후 영장이라는 게 있을 수 없으며, 고문과 잔혹한 형벌은 당연히 금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김준연씨는 예외 규정을 두는 게 당연하다고 하지만, 이에 준할 ‘비상사태의 경우’ 등은 집회에도 적용될 우려가 다분히 있으니 어찌 이를 당연하다고 하는가? 이 천하가 언제나 너의 천하가 될 줄 아느냐? (〈프레시안〉 2017년 7월8일)”
모든 국민은 법률에 의거해 존엄과 인권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어. 조봉암은 권리의 예외를 확대한다면 모든 국민에게 피해가 돌아가며, 예외를 주장하는 이들 역시 희생양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 거야.
이후 조봉암은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돼.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파격적인 인사였지. 여러 분석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농림부 장관으로서 그는 “세계 최고 수준의 균등한 토지 소유를 실현함으로써” 농민의 소득수준을 높이고 지주층을 없애 성공적인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했거니와 한국전쟁에서 남한 농민들이 북한의 선동에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근거를 마련해주었어. 북한의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해. “당신, 백성들이 다 일어난다고 그랬는데 다 어디로 갔는가.”
1950년 5월30일 실시된 2대 총선에서 조봉암은 재선됐고 국회 부의장을 맡았어. 6월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1950년 6월26일에서 27일로 넘어가던 시각, 국회의원들은 ‘수도 사수 결의안’을 의결하는데 이승만 정부는 6월27일 새벽 1시, 수원 천도 결정을 내렸어. 국회가 싸우자고 목울대를 세우던 때, ‘우리가 승리한다’고 호언장담하던 정부는 피란을 개시한 거야. 국회의장 신익희와 부의장 조봉암이 결의문을 들고 경무대(청와대)에 갔으나 대통령은 도망간 뒤였지.
국회의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국회의장 신익희도 다급히 한강을 넘어갔어. 그런데 조봉암은 적에게 넘어가면 안 될 문서들을 챙기기 위해 한동안 서울에 머물렀고, 북새통 속에서 그는 가족을 건사하지 못했단다. 조봉암의 아내 김조이는 일제강점기에 남편 못지않게 이름을 날린 공산주의 운동가였어. 조봉암을 배신자로 벼르고 있던 북한은 피란을 떠나지 못한 부인 김조이를 대신 납치해 갔다. 전세가 역전된 뒤 조봉암은 평양까지 달려갔지만 아내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해.
사형 후 52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판결
서울을 탈환한 뒤 국회는 정부만 믿고 피란을 가지 않아 고초를 치른 국민들에게 대통령이 사과하라는 요구를 의결했어. 국회의장 신익희와 부의장 조봉암, 장택상 의원 등이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사과하라고 요구했지만 이 대통령은 이를 거절해.
국회의원들이 거듭 사과를 요구하자 이승만 대통령의 답은 참으로 파렴치한 것이었단다. “내가 왜 사과를 해. 사과를 하려면 당신들이 하시오.” 정부 문서를 챙기려다 가족마저 챙기지 못한 국회의원 조봉암은 이 능글맞고 뻔뻔한 대통령에게 몇 년 전의 호통을 다시 내지르고 싶지 않았을까? “이 천하가 언제까지고 너의 천하일 줄 아느냐?”
이후 조봉암은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적 강령을 내세운 진보당을 창당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유력한 경쟁자로 떠올라. 이 대통령은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는 정치인을 고이 놔둘 사람이 아니었어. 이승만 정권은 ‘평화통일’ 자체가 이적성이 있다며 국가보안법으로 옭아매려 들었고 급기야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았다. 1959년 7월31일 용맹한 공산주의자였으나 전향한 이후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소임을 다한 조봉암은 교수형으로 그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단다. 그 후 반세기 동안 조봉암의 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으로 지난한 고생을 했어. 1980년대까지도 이사를 하면 경찰이 나타나 한바탕 쓸고 지나갔고, 조봉암의 아들은 신원 조회에 걸려 평생 해외에 나가지 못했다니 알 만하지. 2011년, 52년 만에 대법원 판사 전원 합의로 조봉암 사건에 대한 무죄판결이 내려졌을 때 조봉암의 딸은 이렇게 말하며 기뻐했단다. “이제 아버지의 비에 비문을 새겨 넣을 수 있겠다.” 망우리에 묘지를 조성할 때 경찰은 비석조차 세우지 말라고 막아섰고 어찌어찌 비석은 세웠지만 비문은 새기지 못했다고 해. 대한민국이 얼마나 잔인하고 배은망덕한 나라였는지 아빠는 가늠조차 하기 어렵구나.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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