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대중에게 직접 고발하는 것이야말로 미투 운동의 핵심이다. 피해자들은 언론이나 개인 SNS, 인터넷 게시판을 첫 번째 창구로 삼았다. 폭로에 앞서 가해자를 형사 고소·고발한 사례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이들의 말과 글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서지현 검사는 검찰 내부통신망에 “가해자는 당당히 잘 살아가고 피해자만 박해를 받고 위축되어야 하는 성폭력·성추행·성희롱”에는 “극단적인 과격한 방법밖에 없다”라고 적었다. 다른 피해자들의 글에서도 공포와 불신이 보인다. “제가 오늘 이후라도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도 했고, 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게 방송이라고 생각했고(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피해자).” “걱정되죠. 걱정도 되고 말 그대로 천만 요정인데 내 말을 믿을까, 저 사람의 말을 믿을까?(배우 오달수 피해자)” “성폭행을 당했다고 신고하게 되면 피해자에게 비난이 쏟아지는 사회적 분위기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연출가 이윤택 피해자).”
형법상 무고죄와 명예훼손죄 역시 걸림돌이다. 두 조항은 성범죄 가해자로 고소당한 이들이 피해자에게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다. 무고는 ‘타인이 형사·징계 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공무소·공무원에 대해 허위 사실을 신고하는’ 행위이다(형법 제156조). 명예훼손은 ‘공연히 사실이나 허위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다(형법 제307조 1항, 2항). 성범죄 피해자들은 이 조항에 따라 ‘역고소’를 감수해야 한다.
“처벌 정도보다 중요한 것은 처벌 가능성”
3월8일 정부는 법적 보완책을 제시했다. 12개 관계 부처와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된 ‘범정부 성희롱·성폭력 근절 추진협의회’는 성범죄 형량을 늘리고 공소시효를 연장하며, 여성 경찰관이 피해자를 접촉하고 가명 조서를 활용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가해자가 명예훼손죄와 무고죄를 이용해 협박할 때에는 법률 지원을 제공한다. 여론의 이목은 형량에 쏠렸다. 그러나 정현미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형량을 늘린다고 성범죄가 근절되지는 않는다. 처벌 정도보다 중요한 것은 처벌 가능성이다”라고 말했다.
‘최협의설’은 이해하기 힘든 판례를 수없이 낳았다. 피해자가 술을 마시고 여관에 따라 들어갔거나 많은 사람이 있는 기숙사에서 구조 요청을 하지 않았다면 강간이 아니라고 봤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몸을 누르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거나 하의와 속옷을 벗겨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 사건을 두고도, 대법원은 “유형력의 행사로 반항을 못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판단했다. 가해자가 옷을 벗기는 것을 알아채고 “잠에서 깨어나 ‘하지 말라’고 하며 몸을 좌우로 흔드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 장소에서 탈출하려고 하거나 소리를 질러”야 강간으로 인정받았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현 청와대 민정수석)는 2016년 논문에서 “피고인과 피해자가 사건 발생 이전에 술을 같이 먹었다든가, 여관에 같이 들어갔다든가, 이전 합의 성교의 경험이 있었다든가 등의 일이 있으면 피해자의 진술은 품행이 방정하지 않은 사람의 진술로 의심”받았다고 기존 판례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뿌리 깊은 편견이 낳은 법해석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현 법무부 법무·검찰개혁위원회 위원장)는 2006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자료집에서 “최협의설의 시작이 독일법 해석론을 잘못 들여온 일본 법학자 마키노 에이이치(1878~1970) 교수”라고 주장했다. 독일로 유학 간 마키노 교수가 강간죄 구성 요건인 폭력(Gewalt)이 ‘생명·신체에 대한 현재의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라는 해석론을 들여왔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 법률가들이 이 해석을 받아들였고, 현재까지 굳어졌다는 게 한인섭 교수의 분석이다. 그러나 한 교수는 “독일에서는 폭력의 정도가 경미한 경우에도 강간죄를 인정했다. 마키노는 이 점을 완전히 무시했다”라고 비판했다. 일제의 가부장적 사회 풍조에 맞춰,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법익 침해를 매우 제한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최협의설의 토대인 가부장적 통념을 한인섭 교수는 이렇게 열거했다. △여성은 순결해야 한다 △여성이 저항하는 한 강간은 매우 어렵다 △여성의 거부 의사는 진짜 거부가 아닐 수도 있으며 진정한 거부인지는 아닌지는 말이 아니라 강력한 항거 여부로 알 수 있다 △여성이 온 힘을 다해 저항했으나 남성이 그 저항을 물리적·심리적으로 제압했을 때 강간죄가 성립한다 △순결한 여성이라면 강간을 당했어도 이를 밝히길 원치 않을 수 있다. 이런 시각에 기대어 저항을 강요하는 판례 경향은 피해자의 안전을 위협한다. 한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원은 ‘너는 온힘을 다해 저항하라. 강력히 저항한 증거가 없으면 강간 피해를 당했다는 주장을 못 믿겠다’고 말한다”라고 지적했다. ‘왜 더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나?’라는 물음은 경찰이나 법관 개인의 인격적 결함이 아니라 뿌리 깊은 편견에서 시작된 법해석론의 산물이다.
현재 독일·프랑스·영국·미국 등은 최협의설을 완전히 폐기했다. 그러나 40년 전에는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 사회역사학자 조르주 비가렐로는 〈강간의 역사〉(당대 펴냄)에서 “강간 행위는 법에는 명시되어 있으나 현실에서는 전통적으로 무시되어왔다”라고 지적했다. 상황을 바꿔놓은 것은 1978년 벌어진 ‘엑상프로방스 재판’이다. 1974년 프랑스 마르세유 인근 해변에서 야영하던 벨기에 여성 두 명이 한밤중 불량배 세 명에게 강간당했다. 4년 동안 이어진 재판에서 피해자들은 피고인 측 변호인에게 질문을 받았다. “당시 당신들은 부부처럼 지냈는가?(피해자들은 동성애자였다)” “왜 그렇게 외진 곳을 야영지로 선택했나?” “두 사람은 그 당시 벌거벗고 있었나?” 따위였다.
이런 질문 앞에서 피해자들은 단순히 스스로의 무결함을 주장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법정 안팎에서 싸우고 연대를 강조했다. 피해자들은 “여성이 ‘싫다’고 말하면 그것을 결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여성들이 더 자주, 더 심각하게 가증스러운 행위에 희생된다는 사실보다는 더 이상 그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게 중요하다” 등 증언을 통해 다른 여성들을 법정으로 불러 모았다. 국회의원, 유명 과학자, 레지스탕스가 이들을 위해 서명했다. 결국 입법자들은 ‘폭력의 경계’를 이동시켜야 했다. 강간은 경범죄로 취급할 수 없게 되었다. 신체적 폭력의 흔적 없이도 인정됐다. 남성·아내·동성애자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오늘날 엑상프로방스 재판은 ‘강간 자체에 대한 재판’이라고 불린다.
미투 운동은 한국의 엑상프로방스 재판이 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있다. 공포와 불신 외에, 피해자들의 글에는 연대 의식이 공통적으로 배어 있다. ‘정의를 실현하는 검찰’ ‘후배 연극인’ ‘다른 피해자’ ‘여성들’ 등 피해자들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호출한다. 성폭력 상담 건수가 2배 가까이 늘고 정치인과 연예인들이 지지를 표명했다. 법률도 움직이기 쉬운 환경이다. 서 검사의 폭로 이후 성범죄 관련 법률 개정안이 30건 이상 제출됐다.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폐지, 학내 성폭력 예방 교육, 소멸시효 특례 등 여러 논의가 테이블에 올라왔다. ‘극단적이고 과격한 방법’이 견고했던 법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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