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김소영씨는 어린이 독서교실과 어른을 위한 어린이책 읽기 모임 등을 운영하며 쌓인 노하우를 〈어린이책 읽는 법〉에 담았다.

나란히 서 있는 책등만큼 안심되는 풍경은 없었다. 학교의 많은 것들이 낯설고 두려웠지만 도서관만은 예외였다. 전공인 국문학과 전혀 상관없는 〈터널 공법〉 따위 책들을 꺼내보곤 했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 게, 몰라도 괜찮다는 게 이상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 시절 김소영씨는 도서관에 가기 위해 등교했다. 몇 개월에 걸쳐 서가를 옮겨 다닌 끝에 교육학 서가에 다다랐을 때,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군더더기 없이 직진하는 이야기,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인 데다 예쁘기까지 한 책들이 거기 꽂혀 있었다.

그날 이후 수업 시간에 배우는 현대 시와 현대 소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교재 밑에 두고 보고 또 봤던 〈샬롯의 거미줄〉은 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 서재에 ‘명예의 전당’을 따로 만들어 꽂아둔 〈11마리 고양이〉 시리즈(전 7권) 역시 그때 만난 어린이책이다. 김씨는 “20대에 어린이책을 만나면서 독서를 새롭게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졸업 후 출판사에 입사해 어린이책 편집자로 10년을 일했다. 잘 만들기만 하면 어린이가 읽어줄 거라고, 자신이 그러했듯 어떻게든 읽기만 하면 저절로 좋아하게 될 거라는 믿음으로 일했다. 스마트폰·텔레비전·인터넷…. 책보다 재미있는 게 많은 세상인 걸 간과했다. 좋은 책을 ‘관계자’만 읽고 있는 게 안타까웠다.

독자를 직접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독자와 어린이책을 연결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학습지’ 형태의 독서교육도 못마땅했다. 일방적으로 개입하지 않고도 어린이를 어엿한 ‘한 사람의 독자’로 키울 순 없을까.

고민은 자연스럽게 김씨를 퇴직으로 이끌었다. 몇 개월 준비 끝에 소규모 독서교실을 열면서 세운 수업의 가장 큰 목표는 한 가지였다. 어린이들이 책을 좋아하는 마음을 유지하게 하는 것. 그래서 평생 ‘읽는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틈틈이 어른을 위한 어린이책 독서모임도 진행했다.

김씨가 최근 내놓은 〈어린이책 읽는 법〉(유유 펴냄)은 그 경험과 시행착오에서 얻은 노하우가 담긴 책이다. 김씨는 이 책이 자신이 운영하는 독서교실이나 독서모임 밖의 사람들에게도 독서의 ‘입구’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독서가 일부 독자의 고급 취향에 머무르지 않고,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책은 답을 주기보다 생각할 힘을 준다. 더 많은 수고와 생각을 요구한다. 그래서 책은 힘이 세다. 특히 어린이에게 책 읽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은 어른과, 세상과 싸울 무기를 주는 것이다.”

어린이에게도 ‘한 사람 몫’의 대접이 필요하다

김씨가 어린이들과 수업을 시작하기 전 꼭 하는 일이 있다. 예쁜 잔에 차를 담아서 내놓는다. “어린이에게도 ‘한 사람 몫’의 대접이 필요하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실수할까 봐 걱정하는데, 어린이들도 나름의 사회생활이 있다.”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준비한 수업 내용이 완전히 바뀌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어른들이 독서를 ‘강요’하는지 ‘권유’하는지는 어린이들이 제일 잘 안다. 김씨가 보기에 한국은 독서교육을 너무 일찍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예전에는 전집 시장이 이를 부추겼다면, 최근에는 교과 연계 목록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독자 수준이나 책 자체의 난이도보다 교과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가 중요하다. 출판사는 대체로 원고 분량이나 소재에 따라 임의로 책의 레벨을 구분해서 표기한다. 한국에는 공인된 읽기 난이도 측정 방식이 없다.

“부모들은 연령별로 ‘떼야 할’ 책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이 독서에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모른다.” 김씨가 보기에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책을 권할 때 의외로 고려하지 않는 것이 ‘어린이가 이 책을 좋아하는가’이다.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도 스스로 실패해보는 경험에서 생긴다. “다 읽지 않았다면 왜 재미없었는지, 어떤 부분을 공감할 수 없었는지 이유를 물어보자. 이것 역시 책 읽기의 일부다.”

이는 이른바 베스트셀러나 수상작을 대하는 자세와도 연결된다. 유명해서 사준 책이 재미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책이 주는 ‘권위’ 때문에 아이들은 책을 탓하지 않고 자신을 탓하기 쉽다. “‘나는 책이랑 안 맞나 봐’ ‘나는 책 안 좋아하나 봐’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책과 어린이가 일대일 관계를 맺기 어렵다. 그럴 때는 무슨 이유로 유명한 책인지 설명해주고 사람에 따라 재미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먼저 안내해주면 좋다.” 수상작도 마찬가지다. ‘네가 심사위원이라면 이 책에 상을 줬을 거 같니?’ ‘네가 심사평을 쓴다면 뭐라고 쓸 것 같니?’처럼 물어보는 방식으로 접근하라고 김씨는 권한다. 베스트셀러나 수상작을 읽는 것보다 어떤 책에 대해 어린이 스스로 의견을 가져보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씨는 결과물을 중시하는 독서도 지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책을 읽으면 뭐든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독후감을 강요한다. 어른도 책 읽고 글 쓰는 거 어렵지 않나? 읽기와 쓰기는 유기적일 수 있지만 엄연히 다른 영역인데 손쉽게 ‘독서논술’이라 불린다.” 김씨의 경험상 어린이들은 어떤 책이 마음에 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말하고 싶어 한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신발을 벗으면서 ‘그 장면이 어땠는데요’라면서 조잘댄다. “30분은 어렵지 않게 이야기하는데, 쓰는 건 3분도 어려워한다. 쓰기를 시키면 어떻게든 글은 완성될지 모르지만 어린이의 감상은 오히려 축소되는 게 아닐까.” 말하는 것을 녹음하고 함께 들어보는 것도 추천한다. 독후 활동을 그악스럽게 안 하는 대신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고, 정확하게 답변하는 훈련을 해보는 것도 좋다. “우리가 지난 정권에서 확인했듯, 말을 정확하게 하는 것도 굉장히 어렵다(웃음).”

그럼에도 어떻게든 독서의 결과물을 남기고 싶다면 독후감보다는 독서 목록을 작성해 어린이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법도 있다. 공책에 책 제목을 쓰고 별점을 매기는 간단한 방식이다. 책 읽기에 통 관심이 없던 한 어린이가 어느 날 목록에 형광펜을 칠하고 조그만 글씨로 메모를 남겼던 날을 김씨는 감격스럽게 기억한다. 메모의 내용은 ‘선생님, 비슷한 책 또 소개해주세요’였다. 별 다섯 개를 최고 점수로 했지만, 어떤 어린이는 “도무지 별 다섯 개만 줄 수 없었어요. 이건 스무 개짜리예요!”라고 외치며 교실로 들어오기도 한다. 어린이가 자신의 독서 취향과 방향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연합뉴스어린이책 중에서 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쓰인 책은 어른에게도 그 분야 입문용으로 좋다.

‘읽는 것’이 꼭 책이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면 읽기의 지평도 훨씬 넓어진다. 세상에는 책 말고도 읽을거리가 많다. 한 번은 ‘제수 용품’이라는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준비한 마트 전단지가 노동문제 토론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들이 ‘24시간 연중무휴’의 뜻을 물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김씨 역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인권이나 젠더 감수성은 꾸준히 갱신해야 갖춰진다. “고전이라 할지라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선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과오를 답습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정글북〉을 읽을 때 저자인 키플링이 제국주의 옹호 발언을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안내해줄 수 있어야 한다.” 얼마 전에는 어떤 책을 읽으면서 어린이들에게 ‘몇몇 부분이 여성에게 불리하게 적힌 부분이 있으니 찾아보라’고 안내했더니 생각지 못한 걸 찾아오기도 했다. 한 어린이가 ‘엄마는 왜 무슨 말을 하든 설거지를 하고 있느냐’고 물어온 것. 김씨는 어린이들이 이런 걸 발견해보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슨 책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면 책 말미에 실린 도서 목록을 활용해보자. 책 본문을 쓰는 시간보다 더 오래 걸렸을 만큼 김씨가 공들인 목록이다.

어린이책이 어른에게도 유용하다는 점도 잊지 말자. 어린이책 중에서도 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쓰인 책은 어른에게도 입문용으로 좋다. “어린이 독자들은 냉정하기 때문에 불친절한 책은 가볍게 무시한다(웃음). 잘 만든 지식 정보 그림책은 핵심 정보를 많이 주기 때문에 어떤 분야를 처음 알고 싶을 때 어린이책으로 시작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어린이책 읽는 법〉의 부제를 ‘남녀노소 누구나’로 정한 까닭이다.


맥주 한 잔에 동화 한 편


김소영씨는 어린이가 정말 부럽다고 했다. 어린 시절 어린이책을 많이 못 읽으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 읽어도 이렇게 좋은데, 어렸을 때 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열 살 때 좋은 어린이책을 읽은 어린이는 스무 살에도 마흔 살에도 이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지 않나.” 그렇다고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대신 김씨는 ‘어린이는 이런 거 못하지!’ 하는 마음으로 맥주를 마시면서 어린이책을 읽는다. 어른이 봐도 좋은 어린이책을 몇 권 추천받았다.


〈 밤의 초등학교에서〉는 김씨가 그야말로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은 책이다. 주인공은 학교 경비 아저씨로, 어린이는 ‘엑스트라’ 정도로만 출연한다. 김씨는 “초등학교라는 공간이 주는 정서가 있지 않나. 재학 중인 어린이들보다 이미 그 시기를 지나온 어른에게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다”라고 말했다. 〈롤러 걸〉은 ‘롤러 더비’라는 스포츠를 다룬 만화책으로 몸을 움직이는 여성 사춘기 어린이가 주인공이다. “우리가 얼마나 사춘기 여성을 오해하고 있었나를 알 수 있는 책”이란다. 국내서 중에는 〈플레이 볼〉을 꼽았다. 현실주의 아동문학 계열에서 중요한 지표를 세운 이현 작가의 작품이다. 〈천사를 미워해도 되나요?〉는 본의 아니게 악역을 맡게 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른의 정의가 어린이에게도 정의인지 묻는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