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그는 인공위성을 만들던 잘나가던 연구원이었다. 희귀병 아들이 태어나기까지는 그랬다. 그 뒤 한동안 그는 하늘을 원망했다. 삶이 바뀐 것은 비슷한 질병을 앓는 다른 아이의 부모를 만나고서였다. 이심전심. 서로의 존재만으로 위로받으면서 그는 자기가 할 일을 깨달았다. 그것은 병원과 의사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환자 스스로 자기 의료 정보를 수집·기록·공유하며 이에 기반해 자기 결정권을 갖는 새로운 의료 생태계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자녀를 키우며 ‘길을 찾다 길이 된 사람들’의 얘기를 전하는 ‘2016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부모특강’(http://cafe.daum.net/no-worry) 첫 번째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2016 부모 특강-길을 찾다 길이 된 사람들

제1강(11월29일) 이준호 ‘희귀질환 아들로 새 길 찾은 인공위성 연구원’
제2강(12월6일) 김종호·김경아 ‘딸 부잣집 사교육 탈출기’
제3강(12월13일) 남태일 ‘동네 아버지들:녹색어머니회와 맞짱 뜰 녹색아버지회’


ⓒ아쇼카한국 커뮤니케이션 제공희귀병 아들이 태어난 뒤 이준호 대표(위 사진)는 다니던 인공위성 개발회사를 그만두고 희귀성 난치병 환자들을 위한 의료 정보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는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16 아쇼카 펠로우’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이준호 (프라미솝 대표)

본래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못 말릴 말썽꾸러기였다. 3층 단독주택이었던 이모 집에 놀러 가면 동네 아이들을 불러놓고 그 집 옥상에서 옆집 옥상으로 건너뛰는 게임을 했다(웃음). 그러다 세 번이나 응급실에서 깨어났으면서도 몸이 나으면 다시 “오늘은 내가 뭔가 보여주겠다”라고 큰소리를 치면서 또 건너뛰기를 시도하곤 했다.

그런 기질이 내 진로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중학교 때부터 인공위성을 만든다는 꿈을 꾸게 됐다. 그 시절 존경하던 수학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조는 아이들을 보며 “선진국이 되려면 인공위성 정도는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이래서야 뭘 할 수 있겠느냐?”라고 질책하시는데, 그 말씀이 순간 가슴에 와 닿았다. ‘인공위성이 뭐지? 대한민국에선 저걸 아직 아무도 못 만들었다고? 그럼 한번 해볼 만하겠는걸.’ 이런 단순무식한 발상을 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우리별 1호’가 발사됐다. 선수를 뺏긴 듯해 무척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내가 더 멋진 인공위성을 만들 수 있을 거야’ 하는 단순한 꿈을 밀고 나간 결과 관련 학과를 졸업하고 인공위성을 만드는 회사에 입사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당당히 “비록 우리별 1~3호가 발사됐지만 저는 그보다 더 멋진 위성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별 만든 팀이 참 원망스러워요”라고 말했더니 면접 평가를 하던 팀장이 이렇게 대꾸하는 거다. “그거 우리 팀인데?”(웃음) ‘어이쿠, 떨어졌구나’ 싶었는데 운이 좋아서 합격했다.

그로부터 7년여 정말 신나게 일했다. 내가 들어갈 때만 해도 우리 회사는 아직 기술력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러나 한국인 특유의 열정과 긍지로 빠른 시간 내에 앞선 기술들을 따라잡았다. 해외에 인공위성을 수출하고 기술 컨설팅도 해주면서 소형 위성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벤처회사로 성장했다. 그 속에서 나도 행복했고 스스로가 뿌듯했다. 3~4개 위성 제작 과정에 참여하면서 위성에 대한 전문지식은 웬만큼 갖췄으니, 이제 해외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교수가 되어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나 전념하면 되겠다 싶었다.

병원마다 달랐던 아이의 처방전

그런데 2010년 아이가 태어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대전의 한 산부인과에서 출산한 아이는 선천성 거대모반이라는 희귀병을 갖고 태어났다. 사실 당시에는 아이 병명이 뭔지도 몰랐다. 병원에서도 얼른 아이를 데리고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올라가 보라는 말만 했다. 막상 서울에 가보니 이 병원, 저 병원 하는 얘기가 모두 달랐다. 어떤 병원에선 ‘지금 당장 아이를 치료해야 한다’라고 했고, 또 다른 병원에선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가 치료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이건 어떻게 치료를 해볼 수가 없다’ ‘해외에 있는 병원으로 가야 한다’라고 말하는 데도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별로 어렵지 않겠다 싶은 일을 접할 때면 위성을 만드는 사람들끼리는 “이건 로켓공학이 아냐(It’s not rocket science thing)”라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최고 수준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로켓공학에 비하면 다른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아이에게 막상 그런 일이 닥치고 보니 내게는 오히려 로켓공학이 쉽게만 여겨졌다. 내 아이를 위해 어떤 치료법을 써야 할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너무도 막막했다. 종교가 있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고백이기는 한데 당시에는 신도 많이 원망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차에 누군가의 소개로 모반증 치료에 정통하다는 한 의사를 소개받게 되었다. 대학병원에 근무하다 개인병원을 새로 낸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의사였다. 그 의사는 아이를 보자마자 “이건 내가 본 아이 중에서도 증세가 굉장히 심각한 편이다. 무조건 빨리 치료를 시작하자”라면서 치료비를 제시했다. 깜짝 놀랄 수준의 거액이었다. 엄두가 안 났지만 부모님과 처가에 손을 벌려 일단 치료를 시작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막 개업한 작은 병원에는 마취과 의사도, 입원실도 없었다. 오직 수술실 하나 덜렁 있던 이곳에서 의사는 생후 2주밖에 안 된 아이를 상대로 수술을 시작했다. 마취도 시키지 않은 채 간호사들이 아기 팔·다리를 붙든 상태에서 레이저로 피부를 깎는 시술이었다. 당시 아내와 난 너무나 바보 같아서 이게 얼마나 두렵고 엄청난 일인지를 몰랐다. 두 시간 내내 자지러지게 울다 지쳐 쓰러진 아이를 받아 안으면서도 “수술이 잘 끝나 편안하게 잠이 든 것”이라는 간호사의 말을 그저 액면 그대로 믿었다.

그날 밤 잠에서 깨어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수술한 부위가 등이었는데, 상태를 보니 정말 끔찍했다. 곧바로 병원에 연락을 해보았지만 모두가 퇴근한 그 시간엔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걸 어째야 하나’ 발을 동동 구르며 그날 밤을 꼴딱 새웠다. 이튿날 아침 동이 트자마자 병원에 가니 의사가 오염된 수술 부위를 드레싱해주는데, 생후 2주밖에 안 된 아기가 무슨 힘이 있겠나. 그저 목을 놓아 울밖에.
끔찍한 것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반. 우리 가족은 그런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반복해야 했다. 염증 부위가 아물면 다시 다른 부위를 시술하고, 그 부위에 또 문제가 생기면 드레싱을 받고 하는 시간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는 우리 가족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아침마다 눈을 뜨기가 두려웠다. 아이 상태가 나쁠 때뿐 아니라 호전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일이면 또 다음 수술을 해야겠구나’ 싶어서였다.

세상 사람들의 잔인한 호기심에 상처받다

이런 삶에 전환점이 생긴 것은 아이가 수술받은 부위에 또 한번 크게 부작용이 나면서다. 모반을 절제했던 부위에 심각하게 염증이 생겼는데, 병원 측이 여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화를 내자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 피부가 이렇게 태어난 걸 나 보고 어쩌란 거냐? 이건 팔자다.” 그 말이 내게 약이 되었다. ‘이건 아니다, 이젠 치료를 그만둬야겠다’ 싶은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한때는 우리 아이를 살릴 유일한 우상인 양 비쳐졌던 의사도 별것 아닌 보통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치료를 멈추고 나니, 모든 것이 놀랍도록 달라졌다. 무엇보다 가족 모두가 행복해졌다. ‘이제부터라도 다른 부모들처럼 우리도 아이와 좋은 시간을 가져보자’라고 생각을 바꿨을 뿐인데 아이에 대한 감정도 확 달라졌다. 그 전까지는 미안함·불안감 이런 게 거의 다였다면, 이때부터는 아이가 비로소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아, 우리 아이 눈망울이 이렇게 똘망똘망했구나’ ‘엄마를 닮아 음악도 좋아하고, 춤추는 것도 좋아하는구나.’ 이런 숨은 매력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집 밖에 나갈 때면 늘 신경이 곤두섰다. 아이 외모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보니 외출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내 또래 부모들은 그래도 덜한데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아이를 앞에 놓고 예의 없이 “얘는 왜 이러냐?”라고 묻는 경우도 있었다. 놀이터에도 한밤중에 가는 등 사람 눈을 피해 다녔지만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힘이 들었다. 아내나 내가 상처받는 건 괜찮은데 우리 아이가 그 말을 알아들을까 봐 고통스러웠다.

회사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들 아시다시피 유부남 중에 팔불출이 많다. 점심시간에 차 한잔 마실 때면 자기 아이랑 어딜 갔다 왔다는 둥 자랑하면서 사진을 서로 경쟁적으로 보여주곤 하는데, 나로서는 그 시간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일이 밀렸다는 핑계로 밥도 혼자 먹곤 했다. 뭐랄까, 내가 알던 모든 사람들이 낯설게 여겨진다고나 할까? 나랑은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같기도 하고…. 돌이켜보면 그 시절 아내와 나는 못 말리게 예민하고 공격적이었다. 하다못해 길에서 만난 어린아이와도 싸운 일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 치료를 위해 찾은 또 다른 병원에서 우리 아이와 똑같은 병명을 가진 아이의 부모를 만났다. 순간 말을 안 해도 모든 것이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분들이 겪어왔을 모진 세월과 아픈 경험이 그냥 그대로 느껴지면서 그 아이가 우리 아이인 양 여겨졌다. 그러면서 절로 위로가 되었다. 아마 그분들도 우리를 보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창업을 떠올린 것은 그때부터다. ‘우리 아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이들, 그리고 그 부모들을 위해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희귀병 환자·보호자를 위한 폐쇄형 SNS(소설 네트워크 서비스)부터 먼저 만들어보자는 것이 내 구상이었다.

ⓒ연합뉴스의료 정보가 부족한 난치병 환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곤 한다.

그런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창업하려 했더니 주변 사람들 얘기가 “그건 사업 아이템이 될 수 없다. 그런 SNS는 취미로나 만들라”는 것이었다. 일리가 있다 싶어서 음식점 등을 리뷰하는 상업용 앱을 먼저 만들기로 방향을 틀었다. 몇 달 안 있어 망했다. 그때 깨달았다. ‘오직 돈을 위해 벌인 사업은 이렇게 망하는구나’(웃음).

그 뒤 창업을 함께한 직원들이 다 떠나고 처제와 단둘이 어렵게 사무실을 유지하다 보니 마음이 여러 차례 흔들렸다. 인공위성을 함께 만들던 동료들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수주하게 됐다면서 다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을 때가 특히 그랬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도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렇지만 ‘내가 포기하면 누가 또 이 일을 하지?’ 하는 생각이 나를 붙들었다.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우리 아이나 나 같은 희귀병 환자·보호자는 앞으로도 똑같은 괴로움을 계속 겪어야 할 텐데, 이런 상황을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것은 내 성향과 맞지 않겠다’ 싶었던 것이다.

‘희귀병 환자·보호자를 위해 뭔가 해보고 싶다’

그러던 와중에 지인 소개로 알게 된 것이 임팩트 투자사 중 한 곳인 D3주빌리의 이덕준 대표다. 임팩트 투자는 일반 기업 투자와는 다르다. 곧 사업적인 성공 가능성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얼마만큼 혁신가치가 있는지가 투자 기준이다. 둘 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데 2013년 처음 만난 이 대표는 내가 말한 사업 모델에 기대 이상으로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더니 “임팩트 투자를 정말로 받고 싶다면 앞으로 두 달 안에 당신이 얘기한 내용을 프로토타입(시제품)으로 제작해서 가져와보라”고 말했다.

이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인공위성이나 만들던 내가 두 달 안에 어떻게 디자이너 한 명 없이 잘 모르던 분야의 시제품을 만든단 말인가?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 나한테 투자할 사람은 오직 그 사람밖에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날부터 처제한테 기획안을 만들어내라고 다그쳤다. 돌이켜보면 아마 형부가 아니라 원수 같았을 거다(웃음). 처제가 기획안을 만들면 이를 실제 프로그램으로 구현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아는 게 없으니 온갖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자료를 구했다. 어쩌다 소스 코드를 공개한 데가 있으면 얼른 갖다 쓰는 것은 물론이었다.

미칠 듯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내게 주어진 기간은 60일뿐인데, 이 중 하루만 삐끗해도 일정을 맞출 수 없을 것 같다는 걱정에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한 게, 온갖 난제와 씨름하다 오후 네 시쯤 되어 허탈한 상태로 산책을 나섰다 돌아올 즈음이면 그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 한두 개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다. 그 아이디어를 실마리 삼아 문제를 풀어가다 보면 어느새 그날 몫의 프로그램이 90%가량 완성됐다. 믿기지 않는 산책의 힘이었다.
이렇게 두 달 만에 완성된 프로그램을 들고 투자자들 앞에 가서 설명을 하고 투자를 약속받을 수 있었다(청중 박수). 사업 이후 처음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셈이다. 그 뒤 이재우 보고펀드 대표나 IT 전문가인 정지훈 교수(경희사이버대) 등으로부터 추가 투자를 받으면서 ‘케어플’이라는 의료 정보 시스템도 본격적으로 론칭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겪은 내 경험에 비춰보건대, 병원·의사가 ‘갑’이라면 환자·보호자는 ‘을’이다. 곧 모든 진료나 의무기록은 병원만이 가지고 있고, 그 접근 권한은 의사에게만 주어져 있다. 환자나 보호자는 이것이 자기 기록인데도 접근하기가 어렵다. 그렇다 보니 해당 의사 또는 해당 치료가 나한테 맞는지, 맞지 않는지 알지 못한 채 이 병원 저 병원을 떠돈다. 의료사고가 터졌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병원은 ‘갑’, 환자는 ‘을’이라는 부당한 현실

이건 말이 안 된다. 돈은 환자와 보호자가 내는데 왜 모든 정보와 권력은 의료 서비스 공급자에게만 집중돼야 하나? 의료계의 이 같은 정보 비대칭성 내지 힘의 불균형 문제를 환자·보호자 중심으로 해결해보려는 정보 시스템이 바로 케어플이다. 환자·보호자는 자신의 의료 데이터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왜 나한테 이런 약을 투여했어요?” “왜 나한테 이런 치료 방법을 썼어요?”라고 의사한테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다만 현행법상 병원 밖에서 이런 데이터에 접근할 수는 없다는 것이 보건복지부 방침이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재활치료 시장이다. 전국적으로 보면 발달장애 아동이나 성인들을 대상으로 재활치료나 특수교육을 실시하는 복지관이 200곳, 사설 재활치료센터가 1만 곳쯤 된다고 한다. 이들 기관이 보유한 재활치료 정보를 수집·기록·공유하다 보면, 나중에 설사 이들 기관에서 해당 기록을 삭제한다 해도 환자·보호자는 그 기록을 열람할 수 있게 된다.

해당 기관들로서는 이런 상황이 꺼려질 수도 있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정보를 공유하며 소통하고자 하는 기관을 환자·보호자가 더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12월5일 정식 론칭한 케어플은 현재 3개 시범기관에서 운영 중이다. 케어플이 자리를 잡으면 희귀 질환자와 부모들을 위한 프라이빗 SNS도 제대로 가동할 생각이다.

아이의 현재 상태가 궁금하시다고? 현재 대안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는 즐겁게, 잘 살고 있다. 이를테면 아이는 운동신경이 많이 느린 편이다. 대신 유튜브에서 본 마이클 잭슨의 ‘문 워크’ 춤을 발바닥이 닳도록 연습해 친구들에게 가르쳐주면서 사이좋게 지낸다. 이런 아이와 신나게 놀다가도 옛날에 겪었던 일들이 떠오르면 아이한테 급작스럽게 뽀뽀를 ‘난사’하곤 한다. 너무 미안하고 애틋해서다. 돌이켜보면 아이를 만나고 나와 우리 가족의 삶은 정말 많이 바뀌었다. 이제껏 내 인생이 흘러온 것 자체가 이를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앞으로도 시련은 있겠지만 그 시간들이 나를 잡아주는 힘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기자명 정리·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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