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럭시 노트7’ 파동에도 불구하고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한번 물어뜯은 먹이를 뱉어내지 않았다. 삼성전자가 갤럭시 노트7의 단종을 선언한 직후인 10월12일 낸 성명서에서 엘리엇은 삼성전자를 두 회사로 쪼개 미국 증시에도 상장시키는 계획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갤럭시 노트7 파동은) 불행한 사건이지만, 삼성전자가 세계 최고 브랜드를 가진 글로벌 테크놀로지 기업이라는 우리의 시각엔 변화가 없다. (중략) 삼성전자의 새로운 리더십(이재용 체제)이 지금의 위기를 최고 수준의 기업 운영 및 기업 지배구조 개선으로 극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성명서에 언급된 ‘최고 수준의 기업 운영 및 지배구조 개선’은, 엘리엇이 지난 10월5일 삼성전자 이사진에게 전달한 ‘(기업)가치 증대를 위한 제안 사항’을 가리킨다. 삼성전자를 치켜세우면서 자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얼러댄 것이다. 엘리엇은 미국 내 조세회피처인 델라웨어 주에 설립한 LLC(유한책임회사:법인세를 내지 않고 투자자 신원도 밝힐 필요가 없는 회사 형태)들을 통해 삼성전자 지분 0.62%를 보유하고 있다.
 

ⓒWorld Economic Forum엘리엇은 삼성전자에 인적 분할·배당 요구·나스닥 상장 등을 요구했다. 위는 엘리엇의 폴 싱어 회장.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의 엘리엇은 삼성 이건희 일가에게 마치 저승사자처럼 느껴졌을 테다. 그러나 10월5일의 ‘가치 증대를 위한 제안 사항’에서 엘리엇은 마치 친절한 주치의처럼 달콤하게 속삭인다. 여러 차례에 걸쳐 ‘창업주 가족의 지위는 유지될 것’이라며 꿀 바른 당근을 흔들어댄다. 이 당근이 바로 ‘삼성전자의 인적 분할’이다. 삼성전자 등 주요 계열사에 대한 이건희 일가의 지배권을 큰돈 들이지 않고 획기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이다.

삼성전자는, 다수의 인간과 기업들로 복잡하게 얽힌 지배-피지배 관계에 놓여 있다. 삼성전자에 대한 인적 분할이 실제로 단행될 경우 구체적으로 어떤 사태가 전개될지는 미리 단언하기 힘들다. 그러니 간단한 모델을 사용해서 인적 분할의 본질적 내용을 살펴보자(아래 그림 참조).

A라는 가족이 시가총액 200억원인 B 회사를 20%의 지분(40억원)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가정하자(〈그림 1〉). B사는 10%의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다. B사가 시중에서 유통되는 B사의 주식 20억원어치를 사들여 회사 소유로 갖고 있다고 보면 된다. B사는 ‘자신’을 10% 정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건실한 B사를 탐내는 외부 세력이 워낙 많다. A 일가는 B사에 대한 지분(지배권)을 더욱 강화해야겠다고 느낀다. 60억원(30%) 상당의 B사 주식을 더 사들이는 것이 가장 단순한 방법이다. A 일가의 지분은 50%로 뛰어오를 것이다. 그런데 돈이 없다. 이런 경우, 한국의 재벌 일가들은 주로 ‘인적 분할’을 애용해왔다.

인적 분할은, B라는 하나의 기업을 예컨대 C사와 D사라는 두 개의 회사로 쪼개는 방법이다. 여기서 C사는 D사를 지배하는 지주회사, D사는 C사의 지배하에 영업하는 사업회사의 역할을 맡게 된다. 시가총액 기준으로 200억원인 B사의 자산도 예컨대 C사에 40억원, D사에 160억원 등으로 분할된다. 한편 B사의 주주들은 C사와 D사에 대해서도 기존 지분율을 인정받는다. B사의 지분을 20% 가진 A일가 역시 C사와 D사에 대해 각각 20%의 지분을 보장받는다.

심지어 이런 권리는 기업에게도 인정된다. B사의 자사주(‘자신’을 10% 지배)에 담긴 권리가 인적 분할 이후의 지주회사인 C사로 승계되는 것이다. 즉, C사는 자동적으로 D사 지분 중 10%를 보유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D사가 그 10%에 해당하는 주식을 새로 발행해서(신주), C사에게 넘긴다. 그런데 C사가 D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려면 지분율 10%로는 부족하다. 더 많은 D사의 주식을 사들여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C사가 D사의 주주들(원래 B사의 주주들로, 인적 분할 이후 기존 지분만큼 D사의 지분도 갖고 있다)로부터 그 주식을 사들인다.
 

이제 A 일가가 ‘인적 분할의 마술’을 펼칠 차례다. A 일가는 D사의 총주식 중 20%를 보유하고 있다. 32억원(D사의 시가총액 160억원의 20%)에 상당하는 지분이다. A 일가는 이 D사 지분을 지주회사인 C사에 넘긴다. C사는 이미 갖고 있던 D사 지분 10%(자사주에서 파생된)에 A 일가로부터 받은 20%까지 보유하게 됐다. 즉, C사는 D사에 30%라는 만만찮은 지배권을 확보한 것이다. 이로써 C사의 시가총액(기업가치)은 72억원(기존 C사 시가총액 40억원에 ‘A 일가로부터 받은 32억원 상당의 D사 주식’을 합산한 수치)에 달하게 된다. A 일가는 그 대가로 32억원 상당의 C사 주식을 받는다(〈그림 2〉).

당기순이익 19조원인데 “30조원 배당하라”

결과를 보자. A 일가는 이제 사업회사인 D사 지분을 한 주(株)도 갖고 있지 않다. 대신 원래 보유했던 C사 주식 8억원(시총 40억원인 C사의 지분 20%)과 더불어 32억원 상당의 C사 주식을 새롭게 보유하게 되었다. 모두 40억원 상당의 C사 지분을 확보한 것이다. C사의 시가총액이 72억원이니 A 일가의 C사 지분율은 무려 56%(40억/72억원)에 달한다.

인적 분할 이전, A 일가가 가진 B사 지분은 20%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A 일가가 C사 주식의 56%를 갖고, C사는 D사를 30%의 지분으로 지배한다(〈그림 3〉). A 일가의 지배력은 별도의 자금을 투입하지 않고도 종전보다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삼성전자 인적 분할’ 시나리오가 끊임없이 제기되어온 이유다. 물론 B사에 비해 삼성전자의 소유 지분 관계는 훨씬 복잡하다. 그러나 인적 분할의 본질적인 내용은 동일하다. 삼성전자의 자사주는 12.8%인데, 엘리엇의 제안대로 이 기업을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인적 분할하면, 이건희 일가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큰 구실을 할 것이다.

더욱이 엘리엇은 인적 분할로 설립된 ‘삼성전자 지주회사’와 삼성물산(현재 삼성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의 합병까지 권고하고 있다. 이 또한 이건희 일가로서는 솔깃할 만한 제안이다. 일가가 삼성물산에 직접 가진 지분만 31.5%(10조원 정도)다. 더욱이 삼성물산은 삼성전자의 대주주(4.25%)다. 삼성전자 지주회사와 삼성물산의 합병은 이건희 일가의 지배력을 더욱 강고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러나 엘리엇은 당근과 함께 채찍도 준비했다. 엘리엇은 10월5일 제안서에서, 인적 분할 이후 설립되는 ‘삼성전자 사업회사’가 30조원(1주당 24만5000원) 상당의 일회성 특별 현금배당을 실시하라고 주장했다. 아무리 돈 많은 삼성이라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다. 지난 한 해 동안 삼성전자의 당기순이익이 19조원(연결재무제표 기준) 정도였다. 그러나 엘리엇은 삼성전자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이 77조원에 달하므로 30조원을 배당해도 괜찮다고 주장한다. 이뿐 아니다. 엘리엇의 제안을 수용하면, 삼성전자는 이후 지속적으로 잉여현금흐름(기업이 벌어들인 수익 가운데 세금·영업비용·설비투자액 등을 제외한 현금) 가운데 75%를 주주들에게 내놓아야 한다. 사실 삼성전자가 1990년대 한국의 ‘골목대장’에서 지금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수익을 주주들에게 나눠주기보다 사내에 보유했다가 모험적인 투자(연구개발 등)에 집중적으로 쏟아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 제공삼성 이건희 일가는 현재 엘리엇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이다.

인적 분할 이후 삼성전자 사업회사를 한국거래소뿐 아니라 미국 나스닥에 상장하라는 것도 엘리엇의 요구다. 성사되면, 미국 증권시장으로서도 2014년 중국 IT 대기업인 알리바바의 뉴욕 증시 상장 이후 아시아 기업 관련 최대 행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경영자보다 투자자들의 권력이 막강한 미국 금융시장의 특성을 감안하면, 이 제안에도 미국 투자자들이 삼성전자의 이후 경영을 휘두르겠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엘리엇 출신 이사의 ‘기업 떼다 팔아먹기’

엘리엇은 마지막으로 삼성전자 사업회사는 물론 지주회사에도 ‘3인 이상의 (경영자로부터) 독립성이 보장되는 이사’들을 추가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독립 이사 추가’는, 어떻게 보면 ‘돈을 내놓으라’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요구다. 엘리엇이 말하는 ‘독립 이사’는, 한국의 시민사회가 요구해온, 노동자나 공익을 대표하는 이사가 아니다. 투자자, 특히 엘리엇의 의사를 대표하는 이사다. 투자자를 대변하는 이사를 기업 수뇌부에 집어넣은 뒤 자사주 매입 및 소각(해당 기업의 전체 주식 수가 줄어들어 주가가 오른다), 비용 삭감, 분사, 합병 등 전략적 거래를 강요해서 투자 수익을 높이는 것이 최근 미국 헤지펀드들이 쓰는 방법이다.

실제로 엘리엇이 2%의 지분을 확보한 뒤 이사를 경영진에 집어넣은 미국 IT 대기업 EMC는 지난 9월 ‘델 테크놀로지’에 합병되었다. 엘리엇 출신 이사가 들어간 시트릭스 시스템은 ‘데스크톱 가상화 솔루션’을 개발하는 주요 사업 부문인 ‘고투 비즈니스’를 분사해 로그미인(LogMeIn)에 파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엘리엇의 제안을 종합해보면, ‘이건희 가족의 지배권을 보장해줄 테니 그 대가로 경영권을 포기하라’는 것밖에 안 된다. 실제로 제안서 곳곳에서 “창업주 가족이 삼성그룹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는 변함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미끼를 던진다, 지금 상황에서 이건희 일가가 이런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당장 내년 정기국회에서 민주당의 상법 개정안(경제민주화 법안)들이 통과되면, 자사주를 인적 분할 등 지배권 강화 장치로 사용하는 길이 막힌다. 어떤 개정안은 지주회사 기준을 더욱 엄격하게 만들어, 삼성이 그룹 체제를 지주회사로 개편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자금이 필요하게 만들었다. 이에 더해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7.6%)을 내다팔 수밖에 없는 보험업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이건희 일가는 자칫 삼성전자 등 계열사에 대한 지배권을 통째로 상실할 수 있는 위기로 몰릴 것이다. 삼성생명이 내놓는 삼성전자 주식은, 엘리엇의 부채질 덕분에 인기리에 판매될 가능성이 크다.

엘리엇의 ‘새로운 전투’는 10월27일 삼성전자 임시주총(이재용 부회장을 등기이사로 선임하는 것이 주요 안건)에서 개전되어 내년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절정에 달할 것이다. 국내법상 6개월 이상 0.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면 주주총회에 안건을 상정할 수 있다. 엘리엇의 LCC들은 지난 4월 삼성전자 지분 0.62%를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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