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유럽의 노동법원을 가다 


한국에 노동법원이 필요한 이유


유럽에서는 흔한 노동법원


노동권 보호는 노동법원에서부터
 

 

헌법(제33조)은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라며 노동3권을 명시했다. 현실 법정에서 파업 노동자들은 형사처벌(업무방해죄)·손해배상·가압류 등 3중고를 치른다.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노동법이 거꾸로 노동자를 옭아맨다. 노동법의 정의란 무엇인가? <시사IN>은 전문화된 법원 형태로 운영되는 유럽의 노동법원을 현장 취재했다.

 

 

소송 기간만 7년이 걸렸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하급심에서는 같은 법원 재판부인데 판결이 엇갈렸다. 항소심(2심) 선고 뒤 4년 만에 내려진 대법원 선고는 파기환송, 사실상 ‘패소’였다. 사건을 다시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KTX 해고 여승무원들의 소송 대장정 이야기다. 이 사례는 노동 사건을 다루는 한국 법원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2004년 14대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여승무원들은 KTX를 알리는 ‘얼굴’이었다. 한국철도공사(이하 코레일)는 채용 당시 2년 뒤에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2년 뒤 코레일은 ‘비핵심 업무’ 외주화를 이유로 승무원들에게 자회사인 관광레저와 비정규직 계약을 맺으라고 했다. 여승무원 380여 명은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코레일은 계약을 거부한 280여 명을 해고했다.

2008년 5월 마지막으로 법원 문을 두드렸다. 장기 파업 끝에 남은 34명은 코레일을 상대로 ‘근로자 지위보전 및 임금지급’ 소송을 냈다. 2010년 8월26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41부(부장판사 최승욱)는 “해고된 KTX 승무원이 코레일 직원이다”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복직할 때까지 월급 150만~18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코레일 항소로 이어진 2011년 8월19일 서울고등법원 민사15부(부장판사 김용빈)도 “코레일이 직접 고용관계에 있다”라고 판결했다.

ⓒ사진가 2014년 11월 쌍용차 정리해고 무효소송 최종 선고를 앞두고 대법원 앞에서 노조 관계자들이 2000배를 하고 있다. 대법원은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34명이 승소하자, 소송을 내지 않았던 여승무원 118명도 추가 소송에 나섰다. 2011년 8월30일 서울중앙지법은 118명이 낸 소송에서 역시 승무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2012년 12월8일 서울고법 민사1부(부장판사 정종관)는 달리 판단했다. 재판부는 “제출된 사실만으로는 직접적인 근로계약 관계가 성립됐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판시했다. 똑같은 처지였던 해고 승무원들이 똑같은 사안으로 똑같은 소송을 냈는데 재판부 판결이 갈렸다. 사실관계도 똑같았는데 판단만 달리한 것이다.

대법원 역시 지난 2월 “직접 고용관계로 볼 수 없다”라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KTX 승무원과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의 업무가 구분돼 있다”라는 점을 판결 근거로 삼았다. 현재 파기환송심이 진행 중이다. 파기환송심에서 패소가 확정되면, KTX 승무원들은 그동안 받았던 임금을 다시 토해내야 한다. 임금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지난 3월 소송에 참여한 박 아무개씨가 자살했다. 스물다섯에 승무원이 되어 스물일곱에 해고된 그녀는 서른여섯에 생을 마감했다. 세 살 난 딸에게 8640만원의 빚을 남긴 걸 미안해했다(<시사IN> 제408호 ‘빚만 남기고 떠나서 미안하다, 아가’ 기사 참조).

노동계에 ‘시간은 사용자 편’이라는 통설이 있다. 노동 사건은 민사소송에 비해 신속성을 요구한다. 권리 구제를 다투는 동안 해고 노동자들은 대개 임금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이 부실한 상황에서 구제 기간마저 늦어지면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법조계에서는 노동 사건을 ‘전신(全身)적 소송’이라고도 정의한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165명은 2010년 해고무효 확인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였던 서울남부지법 민사13부(부장판사 강인철)는 정리해고가 정당하다고 봤지만 2심을 맡은 서울고법 민사2부(부장판사 조해현)는 “정리해고 요건 중 사측의 해고 회피 노력이 없었다”라며 해고가 무효라고 판결했다. 2014년 11월 대법원 3부(주심 박보영 대법관)는 다시 “해고가 적법하다”라고 판결했다. 2009년 정리해고부터 대법원 선고가 내려진 2014년 11월까지 쌍용자동차 노동자나 그 가족 25명이 숨졌다. 정리해고가 단행된 단일 사업장에서, 전 세계적으로도 드문 죽음의 행렬이었다.

KTX 여승무원 판결,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판결, 또 쟁의행위에 대한 잇단 거액의 손해배상 판결 등 일련의 법원 판결을 두고 비판 목소리가 높다. 지난해 <시사IN> 독자 배춘환씨가 씨를 뿌려 ‘손잡고’라는 시민단체까지 만들어졌다. 손잡고는 올해 노동3권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 개선에 나섰다.

10년 전 한국도 도입을 검토했던 노동법원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흔히 입법론과 해석론이라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변화하는 노동 현실을 반영해 새로 법을 만드는 게 입법론이고, 기존 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노동권을 보장하는 것이 해석론이다. 해석론은 사실심인 1심과 2심에서 재판부가 판단 재량과 전문성을 갖추고 충분히 심리하면 실질적인 정의에 부합하는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법원별로 노동 전담 재판부가 있기는 하다. 노동 전문 변호사나 학자들은 전담 재판부에 속한 법관의 전문성에 의구심을 표한다. 김기덕 변호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는 “노동법은 민법과 근본 전제가 다르다.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 1대1 계약관계가 아닌데, 판사들이 노동문제를 시민법 테두리 안에서 해석한다”라고 비판했다.

노동법은 역사적으로 노동자를 보호하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자유계약 관계를 중요시하는 시민법을 수정한 것이다. 시민법대로 사용자와 노동자가 자유계약을 맺으면,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는 불리한 계약을 체결한다.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계약을 맺고 재생산이 불가능할 만큼 혹사당하기 일쑤였다. 19세기 영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노동법인 ‘공장법’은 노동자 계층의 재생산을 위한 안전장치였다.

법원 내 노동법 커뮤니티를 만들어 노동법을 연구하는 판사들도 있다. 하지만 대개 노동 전담 재판부에 속한 판사들도 순환보직제 때문에 2~3년 근무하다 이동한다. 사건만 맡을 뿐, 제도적으로 노동법 전문 역량을 쌓을 시스템은 아닌 셈이다.

행정법원이나 가정법원처럼 아예 노동법원을 전문화하고, 신속한 구제를 위한 특례 절차를 만들고, 전문 법관을 키우자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내에는 낯설게 들리지만, 유럽에서는 노동법원 전문화가 보편적이다(유럽에서는 흔한 노동법원 기사 참조). 한국에서도 노동법원 설치 문제가 처음 제기되는 것은 아니다. 10년 전 사법 개혁 차원에서 도입이 검토되었다. 참여정부 시절 사법개혁위원회는 하급심 강화 차원에서 노동법원 설립을 준비했다. 당시 국민참여재판 제도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은 결실을 맺어 시행되고 있지만, 노동법원은 장기 과제로 남겼다. 사법개혁위원회 기획단장을 맡았던 김선수 변호사(법무법인 시민)는 “그땐 장기 과제로 남겨두었는데, 노동 현안이 불거지고 있는 이제는 현실화할 때가 되었다”라고 말했다(노동권 보호는 노동법원에서부터 기사 참조).


참심형 노동법원의 도입을 검토한 것은 세 가지 장점 때문이다. 첫째 노동 사건의 이원화와 중복에 따른 구제 지연, 둘째 노동 사건을 다루는 법관의 전문성 제고, 셋째 판결 결과에 대한 불신 해결이 그것이다. 사내하청 노동자를 상징하는 현대자동차 노동자 최병승씨 사례를 보면, 권리 구제 절차가 얼마나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 알 수 있다(아래 <표> 참조).

 

사법개혁위원회가 검토한 노동법원은 직업법관만으로 이뤄진 법원 형태는 아니다. 직업판사와 함께 노사를 대표하는 명예판사(참심원)가 판결에 참여하는 참심형 노동법원 형태다. 참심형 노동법원은 사법 민주화 차원에서 시민들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과 유사하다. 다만 노동자 단체와 사용자 단체에서 각각 추천을 받은 참심원을 명예판사로 위촉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국민참여재판이 처음 논의될 때 법원 상층부는 배심원 대신 참심원을 선호하기도 했다. 배심원은 시민 전체를 모집단으로 삼아 무작위로 뽑는 것이고, 참심원은 노사 전문가 중에서 뽑는 것이다. 노동자 위원, 사용자 위원, 공익 위원으로 구성된 노동위원회와 유사한 형태다.

현대자동차 사내 하청업체에 입사한 최씨는 직접 고용과 정규직화를 요구하다 2005년 해고되었다. 그는 현대차와 하청업체를 상대로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했고, 각하 처분을 받자 중앙노동위원회에 구제 신청을 냈다. 하지만 또다시 각하 처분을 받자 그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행정법원에 소송을 냈고, 소송은 고등법원을 거쳐 대법원까지 이어졌다. 부당해고 구제는 노동위원회가 전담하고 있어서 노동위원회를 거쳐야 했다. 신청부터 최종 승소까지 무려 7년이나 걸렸다. 지방노동위원회-중앙노동위원회-행정법원-고등법원-대법원까지 사실상 5심제를 거친 것이다. 노동분쟁 해결 절차가 노동위원회와 법원으로 이원화되고 중복되었기 때문이다.

유럽 노동법원에 조정·합의 사건이 많은 까닭

노동위원회부터 대법원까지 이어진 구제 절차를 거쳐 부당해고로 확정되어도 구제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사용자가 벌금 처분을 받더라도 행정처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노동자는 다시 민사소송을 통해 보상 판결을 받아야 한다. 해고부터 실제 보상까지 소송만 8~9차례 거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현실 때문에 시간은 사용자의 편이라는 말이 통용된다. 법은 멀고 생활고는 가까워, 권리 구제를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노동위원회와 기능을 조정해 노동법원을 따로 설치하면 이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 권리 구제 효과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행정법원이나 가정법원처럼 직업법관만으로 노동법원을 특화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2005년 사법개혁위원회가 노동 사건의 특수성을 들어 참심형을 제안한 이유는 KTX 사례가 잘 보여준다.

대법원 판결을 접한 승무원들은 대법관들이 현장 상황을 너무 모른다고 입을 모았다. 일을 하다 보면 무 자르듯 코레일 정규직인 열차팀장은 안전 업무를 맡고, 비정규직인 승무원은 서비스 업무를 맡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류상으로는 업무가 구분되었을지 몰라도, 현장에서는 섞여서 같은 업무를 했다. 직업법관은 법리에 밝지만, 노동 현장을 ‘글자’로 아는 경우가 많다. 직업법관이 보지 못하는 현장의 문제를 노사 명예판사(참심원)가 참여해서 보완하자는 취지다. 권두섭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는 “노동 사건은 법리 판단도 중요하지만 내용과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부당해고 소송을 예로 들면 판사가 적극적으로 석명권을 행사하기보다 노사가 제출한 증거만 보고 판단하기 일쑤다. 해고의 정당성은 회사가 입증해야 하지만 우리 법원에서는 노동자가 부당성을 입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노사 명예판사가 참여하면 판결에 대한 불복률도 낮아진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노동 사건의 경우, 노사 모두 판결에 대한 신뢰도가 높지 않다.  KTX 승무원 사례나 쌍용자동차 사례 모두 최종심까지 이어졌다. 1심 재판부터 노동자와 사용자가 추천한 명예판사가 참여하는 유럽 노동법원의 경우 조정·합의 사건이 많고, 항소율도 높지 않은 편이다. 판결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는 얘기다.

2005년 사법개혁추진위가 장기 과제로 남겨놓는 바람에 한동안 먼지를 쓰고 있던 노동법원 설치 법안은 2013년 최원식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대표 발의했다. 19대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해 파기될 운명이지만, 법안까지는 제출되어 한 단계 진전된 상태다. 물론 참심형 노동법원이 노동분쟁이 사라지게 만드는 ‘도깨비 방망이’일 수는 없다. 그러나 법원 판결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고 법관의 전문성을 키우는 대안은 될 수 있다. 또 노동자뿐 아니라 사용자 사이 극한 대립의 완충장치가 될 수도 있다.

기자명 고제규·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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