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온 일본군은 경악했지. 관군은 혼비백산 도망가기 일쑤였거든. 부산에 상륙한 지 20일도 못 되어 수도 한양을 점령했는데(부산에서 서울까지 그냥 걷기만 해도 그 시간이 걸릴 거야), 난데없이 백성이 ‘의병’이라며 목숨 내놓고 덤벼대니 어이가 없을밖에. 국사 시간에 임진왜란을 배우게 되면 아마 의병장 이름을 외우느라 골머리를 앓을 거다. 헤아리기 어려울 만치 많은 이들이 나라의 어려움을 맞아 떨쳐 일어섰으니까. 그런데 과연 이 의병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물려받고 계승해야 할 역사적 ‘전통’일까? 아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먼저 의병이란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팽개친 뒤 발생한 기형적 현상이기 때문이야. 국민의 세금을 받아 운용되는 국가는 평소에 자신을 지킬 무력을 갖추고 전쟁이 나면 외침을 막아내야 할 의무가 있어. 평생 칼 한번 안 잡아본 시골 선비가 “어찌 나라의 위기를 두고 볼 것인가” 피를 토하고, 여기에 감동한 농민들이 낫과 도끼를 들고 일어서기 전에 국가가 해야 했다는 뜻이야. 의병이란 국가 시스템이 무너진 잔해 위에 피어난 민들레꽃이란다. 의병 자체는 감동적이지만 결코 ‘오늘에 되살려야 할 전통’이 될 수 없는 이유야.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김덕령의 초상화.

두 번째 불편한 진실. 권력을 쥔 사람들이 의병을 철저히 배신했지. 적에 맞서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전사하거나, 처자식이 굶어죽건 말건 전 재산 바쳐가며 희생한 의병장의 이름은 조선 조정이 발표한 선무공신(宣武功臣), 즉 전쟁 수훈자 명단에 거의 보이지 않아. 한 번 싸움으로 조선 수군을 말아먹은 원균이 일등 공신에 올라 있는 명단에 저 유명한 곽재우나 김면, 조헌 등의 이름이 없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만 해도 국가의 배은망덕이지만, 더 기가 막히게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어.

광주광역시에 가면 충장로라는 거리가 있어. 서울에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충무로와 을사늑약 때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을 기리는 충정로 등이 있듯, 충장로 또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김덕령의 시호 충장공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단다. 김덕령은 힘세고 용맹하기로 당시에도 유명했고 그가 의병을 일으키자 5000명이 몰려들었다고 해. 하지만 김덕령은 이 명망 때문에 오히려 조정의 견제를 받게 되고, 이몽학이라는 사람이 일으킨 반란 와중에 반란군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맞게 돼. 마지막까지 담담하게 “공을 세우지 못했으니 죽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다른 사람들은 죄가 없으니 살려주십시오”라고 호소하던 대장부였지만 그가 남긴 시조에서 그 가슴속에서 얼마나 천불이 일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어.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나라를 뒤덮은 불, 즉 전쟁은 그치게 할 방법이 있지만 자신의 마음속에는 냇물 하나 없는 천불이 나니 끌 도리가 없다는 뜻이야. 혹여 무슨 일을 벌일까 두려워 의금부에서 건장한 병사 100명을 동원하여 감시했다는, 내로라할 용사 김덕령의 허무한 죽음을 보고 조선 백성은 무슨 생각을 했겠니. 답은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어. “남쪽 선비와 백성은 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이 있는 자는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

“냇물 하나 없는 천불”이 속을 까맣게 태웠던 사람은 김덕령 혼자가 아니었어. 김덕령 휘하의 최담령은 용감한 사람이었지만 김덕령이 죽은 뒤에는 강아지도 무서워하는 졸장부 행세를 하면서 평생을 살았고, 경상도 일대 최고의 수훈자라 할 곽재우는 전쟁이 끝난 뒤 귀양살이를 해야 했으며, 함경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남쪽으로 내몰았던 의병장 정문부는 함경도 관찰사의 험담 때문에 제대로 된 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후일 이괄의 난에 연루됐다 하여 매 맞아 죽게 돼. 정문부는 자식들에게 한 맺힌 유언을 남기지. “벼슬할 생각 말고 남쪽 가서 살아라.” 아마 그들 모두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을지도 몰라. “자식들아. 너희는 무슨 난리가 나든 의병 따위 일으키지 마라.”
 

ⓒ시사IN 조남진2014년 4월18일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해경과 해군, 민간 잠수사 등으로 구성된 구조대가 실종자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다.

“다음부터는 국민들 부르지 마십시오”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해양 사고에서 인명 구조를 담당한 해경이 무능의 극치를 보인 것은 너도 알고 있을 거야. 또 침몰한 배에서 시신을 수습할 능력도 제로에 가까웠지. 그래서 해경이 계약을 맺은 업체의 잠수 인력 외에도 전국에서 수많은 잠수사들이 달려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수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단다. 하던 일을 작파하고 온 사람도 있었고 자식 잃은 부모의 울부짖음을 듣다못해 무작정 팽목항으로 달려온 사람도 있었어. 그런데 잠수사 가운데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어.

이 사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한 일이 뭔지 아니? 잠수사 가운데 관리와 지휘를 맡았던 민간 잠수사 한 명을 ‘업무상 과실치사’로 고발한 거란다. 그가 해경과 계약을 맺은 업체 소속이라서 잠수사 ‘관리 감독’ 책임이 있으니 사망 사고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유였지. 이에 동료 잠수사 한 명이 “목숨을 걸고” 증언에 나섰어. “고발당한 잠수사가 계약 업체 소속도 아니며 자원해서 달려온 잠수사였다”라고 말이야. 곧 ‘의병’이었지.

당국의 무리수를 고발한 잠수사는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이렇게 부르짖는다. “다음부터는 이런 참사, 재난이 일어나면 국가가 알아서 하셔야 할 겁니다. 국민들 부르지 마십시오.” 아마 그의 가슴에도, 참사를 당한 나라와 국민을 돕기 위해 왔다가 졸지에 ‘과실치사범’이 될 위기에 처한 35년 경력의 고참 잠수사의 가슴에도 ‘끌 수 없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을 것 같아. “우리가 왜 살인자가 돼야 하는가.”

세계 어느 나라든 자신을 버리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들을 기린다. 단지 교과서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희생을 국가적으로 기억하고, 그들의 명예를 소홀히 하지 않아. 미국은 지금도 한국전쟁 때 전사한 미군의 유해를 찾기 위해 수십억, 수백억원을 쓰고 있어. 이 모든 건 일종의 약속이란다. “이 나라는 국민에게 진 신세를 꼭 갚는다” 하는 약속.

하지만 우리의 역사는 기이하게도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전통을 지니고 있어. 몽골 침략 때 적이 쳐들어오자 도망갔던 양반들은 천민들이 겨우 지켜낸 성에 돌아와 자기 집 은그릇 없어졌다고 천민들을 죽이려 들었고, 임진왜란 때 나라를 그 지경으로 망가뜨렸던 임금과 벼슬아치들이 의병장을 서슴없이 죽였듯, 생때같은 아이들 수백명을 두 눈 멀거니 뜨고 잃었던 무능한 당국은 제 발로 달려온 잠수사에게 과실치사 혐의를 내린다. 가끔 아빠는 네게 역사 얘기를 하기가 부끄럽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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