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새누리당 홍일표 의원이 상고법원 도입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상고법원이란 대법원의 상고심 기능을 나눠 맡는 법원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앞장서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대법원은 상고법원이 만들어져 상고심 부담이 줄어들면, 대법원이 사회적 영향이 큰 사건에 집중하는 정책법원 구실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올해 5월 정의당 서기호 의원은 대법관 증원을 핵심으로 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냈다. 별도의 상고 전담 법원을 설치하기보다는 대법관을 늘려서 상고심 처리를 원활히 하자는 취지로, 사실상 상고법원을 반대하는 법안이다. 대한변호사협회도 반대 의견이다. 논란이 이는 가운데, 한 현직 판사가 상고법원보다는 1심을 강화하고 상고제한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취지의 글을 법원 내부전산망에 올렸다. 〈시사IN〉은 해당 글이 사법부 내부의 고민과 논쟁 지형을 드러내준다고 판단해 발췌 요약해 싣는다. 원글은 분량이 상당해 절반 이하로 압축했고,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몇몇 전문적인 논의는 쉬운 말로 바꾸었다.


상고법원에 대한 제 의견은 ‘유보적 묵인’이었습니다. 대법관 한 명이 담당하는 상고 사건이 지나치게 많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한국의 심급 구조가 왜곡되어 있다는 인식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전체 사건에서 한국 대법관 14명(실질적으로는 12명.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은 소부에서 빠짐)이 담당하는 상고심 사건 수 비중(1.06%)이, 독일의 상고심 연방법원 판사 321명(5개 상고심 연방법원 합산)이 담당하는 상고심 사건 비중(0.29%)의 3.6배에 달할 정도입니다. 상고심이 지나치게 비대화돼 본래의 법률심(법률문제만 심판하는 재판)으로서 기능하는 데 문제가 발생한다는 인식에서였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방식은 한국이 비교법 모델로 주로 참조하는 독일과 미국 등에서 시행하는 상고제한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상고허가제가 있습니다.

ⓒ시사IN 조남진대법원(위)은 상고법원이 만들어지면 대법원이 정책법원 구실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사실상 ‘옥상옥’, 4심 체제다. 전담 법원을 만들기보다 대법관 수를 늘리자는 반대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그럼에도 상고법원 제도를 사실상 찬성한 것은 현실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당장 상고제한 제도의 도입이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상고심 사건 숫자가 유지되거나 늘기를 원하는 변호사 단체와, 상고 제한에 반감을 가진 변호사 출신 국회의원들이 있어서 상고제한제 도입이 만만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상고법원 설립안이 장기적으로 보아 상고심 비중을 줄이는 과도기적 수단일 수 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심리불속행 제도(심리 자체를 열지 않고 상고를 기각)를 유지하면서 상고법원을 운영해 대법관 1인당 비정상적인 업무 부담을 줄인 다음, 1심을 중심으로 한 사실심(사실문제와 법률문제 모두 심판하는 재판) 강화를 위한 판사 충원 등이 2차로 이루어져 항소·상고 사건의 비중이 줄어들면, 상고제한제 도입도 장기적으로 고려해볼 수 있다고 낙관한 측면이 큽니다.

그런데 최근 논의를 보면서 상고법원에 대한 유보적 묵인 의견을 바꿔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계기는 대법원이 심리불속행 제도 폐지를 상고법원 도입의 전제로 약속한 것입니다. 현재 심리불속행 제도가 있는데도 상고심 사건 수는 비정상적으로 높습니다. 심리불속행 제도를 폐지하고 다수 판사가 포진한 상고법원이 생길 경우, 상고심 사건 수는 더더욱 비정상적으로 높아질 위험성이 큽니다. 이렇게 되면 사실심 판단이 좀 더 자주 뒤집힐 가능성이 늘어납니다. 이는 사실심에 대한 신뢰를 더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시사IN 신선영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법원 입구에 상고법원의 필요성을 알리는 입간판이 놓여 있다.
1심을 중심으로 사실심 충실화에 가장 필요한 것은 ‘판사 1인당 사건 부담 수 대폭 감소’입니다. 저는 독일 연수 중 1심을 기준으로 독일 법관 1인당 사건 부담을 한국과 비교해 통계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분석 결과, 한국 판사가 3~4배 많은 사건 수를 더 빠른 속도로 처리했습니다. 독일 판사의 사건 부담은 전체 사건 수 기준으로 한국 판사의 36%(본안 소송 사건 수 기준 30%)임에도, 1심 사건을 한국 판사(1심 평균 4.4개월)가 독일 판사(1심 평균 5.7개월)보다 1.3개월 빨리 처리합니다.

법관 1인당 한 달에 90건 이상 처리

독일 판사는 1심에서 당사자의 모든 주장·입증을 변론 종결 전에 다 검토해 실질적 토론을 진행할 준비를 합니다. 또 충분한 변론 시간을 확보해 당사자들의 주장을 듣고 토론을 진행합니다. 한국 판사가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은 과도한 사건 부담 때문입니다. 3~4배 많은 사건을 던져주면서 사실심을 충실화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독일에서는 700만~800만원 이하의 사건을 담당하는 법원 판사도 한 사건당 변론 시간을 30분에서 1시간 정도 확보합니다. 한국의 소액 단독 재판부 판사는 한 사건에 5~10분도 확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실심 충실화 사법제도개선위’가 7월9일 활동을 종료하기까지 내놓은 6개 건의문에서는 1심 판사의 대폭 충원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심 충실화 방안이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고, 구체적 충원 계획도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상고법원 제도가 누구나 세 번의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잘못된 법의식에 기초해, 비정상적으로 높은 상고심 비중을 늘리고 고착화해 사실심을 더 약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은 저의 새로운 주장이 아닙니다. 서울대학교 민사소송법 담당 호문혁 명예교수도 이 부분을 지적하면서, 독일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 시행하는 상고제한 제도가 올바른 방안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상고 제한의 전제로 사실심 강화를 말하면서, 1심 판사를 대폭 증원해 판사에게 슈퍼맨이 될 것을 강요하는 재판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정공법으로 상고제한 제도를 추진하면서, 판사 1인당 사건 부담을 대폭 줄여 사실심을 충실화하는 방안으로 설득하기를 제안합니다. 순진한 낙관론일 수 있지만 이것이 사실심을 충실화하고 비정상적으로 높은 상고심의 비중을 낮추는 바른 길이 아닐까 합니다. 최근 부산지방법원의 판사·변호사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판사뿐 아니라 변호사 또한 재판부당 처리 사건이 너무 많은 점을 1심 충실화의 ‘가장’ 큰 걸림돌로 뽑았습니다. 5월11일 서울북부지방법원

포털사이트에 관련 광고도 한다.
민사실무연구회 발표에서도 “적정한 사건 부담이 전제되어야 하기에 법관 1인당 사건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문제 인식과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지만, 최근 사건 수 증가로 오히려 사건 부담이 커지고 있어 1심 충실화 방안을 실현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음”이라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7월15일 상고법원 반대 법학자 100인 공동선언문에서는 상고심 정상화의 전제로 사실심 강화를 이야기했습니다. ‘법관 1인당 한 달에 90건 이상의 사건을 처리한다. 고등법원 판사들은 지난 10년간 거의 증원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실심 법관의 지나친 업무량을 먼저 감축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정도라면 법원도 사실심 충실화를 위한 하급심 판사 수의 대폭 충원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추진해볼 만하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심 충실화의 전제조건은 판사 충원

동시에 그러한 모델로 처리 가능한 적정한 사건 수를 객관적으로 측정해, 어느 정도로 판사 수를 증원해야 하는지 판단할 기초 데이터를 마련해야 합니다. 1·2심 합의재판부만 충실화한다면 전체 판사 수(1~2년 전 2800명가량)의 1.5배 증원, 단독까지 한다면 2배, 가장 많은 사건 수를 담당하는 소액까지 한다면 3배 등 거칠게 이야기하면 그렇습니다. 가장 많은 국민 특히 서민이 접하는, 전체 사건 수의 60~70%에 달하는 소액 사건의 충실한 심리가 사법부 신뢰 강화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쯤 되면 자꾸 독일, 독일 하는데 독일 재판 방식이 진짜 좋은 건 맞느냐는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이 있어야 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해외연수 기간에 독일 사법부의 신뢰도를 다양한 방식으로 확인했습니다. 최근 한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독일의 사법제도 신뢰도(검찰·경찰 등을 포함한 통계이기는 하나)는 67%입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각 83%), 스위스(81%) 등에 이어 아일랜드(67%)와 함께 42개국 중 6위를 기록했습니다.

한국은 27%로 무법지대에 가까운 콜롬비아와 비슷한 39위(조사의 타당성이 논란이 되고 있기는 하다)에 그쳤습니다. 다만 다국적 기업의 투자 판단의 한 요소로 물품 대금을 받아내는 재판 절차의 신속함과 효율성은 한때 세계 2위로 평가받을 만큼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판사들은 상시화된 야근, 주말 근무로 세계 최고 수준으로 빠르고 저렴하게 재판하면서 국민에게는 불신을, 다국적기업으로부터는 찬탄을 받는 모순적 상황입니다. 일선 판사로서 약간 억울하게 느껴집니다.

개인 경험으로도 민사소송법이 규정한 집중 구술심리만 실현해도 사실심이 크게 충실화되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올라갈 거라고 확신합니다.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에서 지난 5개월간 민사단독 재판장으로서 매우 불완전한 형태이지만 실험을 해보고 있습니다. 모든 주장·입증 방법을 채택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건 초기부터 적극적인 석명준비 명령을 합니다. 가능한 한 모든 주장·입증을 1심에서 하도록 유도하고, 통상 변론 종결 후나 판결에 대비해 이루어지는 철저한 기록 검토를 변론기일 전마다 합니다. 이를 토대로 잠정적 결론을 쟁점별로 제시하고 의견을 듣는 식으로 재판 모델을 운영했더니 조정화해율·종국률·상소율이 크게 좋아졌습니다. 판결의 결론을 내가는 과정이 투명화된 것이 승복률을 높이는 주요 이유가 된 듯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 모델을 운영할지 고민 중입니다. 변론 전날 밤을 대부분 새우게 되면서 몸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졌고, 변론 시간 확보를 위해 야근과 주말 근무가 더 늘어났으며, 사건처리율이 떨어졌습니다. 재판 모델을 바꾸면서 그에 필요한 근로시간을 측정해 나중에 사실심 충실화를 위한 판사 수요를 거칠게나마 측정해보려고 실 근로시간을 간단히 정리합니다. 주 단위 근로시간으로 보면, 얼마 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법원 직원분에게 과로사를 인정한 근거가 된 월 53시간 초과근무(한 달 4주, 1주 5일 기준으로 산정하면 1주 13.25시간, 1일 2.65시간)를 훌쩍 넘기는 경우가 많고, 밤샘 근무가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기자명 차성안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판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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