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은 약속을 이행하라.”

8월17일 오후 3시, 부산대학교 본부 4층 테라스에서 국문학과 고현철 교수(54)가 마지막 외침을 토해내고 몸을 던졌다. 고 교수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곧 숨을 거뒀다. 현장에서 발견된 A4 2장짜리 유서에는 총장 직선제를 이행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조용하고 한 번도 격앙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사람인데….” 빈소에서 만난 고인의 지인들은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인문대학 동료였던 신경철 교수(고고학과)는 “고인은 전형적인 교육자이자 학자였다”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싸움에 앞장서지는 않았지만 고 교수는 김기섭 총장이 공약을 뒤집고 직선제를 폐지한 이후 아내에게 괴로운 심경을 토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서에는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대학의 자율성이 훼손되는 상황에 대한 울분이 드러난다.
 

ⓒ시사IN 이명익총장 직선제 유지를 요구하며 투신한 고현철 교수의 분향소가 8월18일 부산대에 차려졌다.
2012년부터 부산대는 총장 선출 방식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어왔다. 총장 직선제를 고수해야 한다는 교수회와 간선제 전환을 추진하는 대학본부가 대립했다. 비극은 학칙을 개정하면서 시작됐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교육과학기술부(교육부)는 대학 선진화의 일환으로 국립대 총장 간선제를 추진했다. 2011년 직선제를 통해 선출된 김 총장은 교육부 방침에 따라 2012년 8월 총장 선출 방식을 간선제로 변경했다. 간선제는 교수, 외부 인사, 교직원, 학생 등 50명이 추천위원회를 구성해 총장을 선출한다. 이 중 교수는 30명 내외이며 추첨으로 선정된다.

교수회는 반발했다. 교수들은 총장실을 점거하고 211일간 농성했다. 지난해 12월 실시한 교수 총투표에서 교수 84%가 직선제를 지지했다. 올해 들어 갈등은 더욱 격해졌다. 교수회는 지난 6월 직선제 실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반면 대학본부는 10월로 예정된 총장 선거를 앞두고 간선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8월4일 김 총장이 서한을 통해 ‘간선제 추진’을 최종 통보하자 교수회는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8월17일 고 교수가 투신하기 한 시간 전 12일간 단식을 이어오던 김재호 교수가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 갔다.

교수회 비대위는 이번 사건을 단순한 학내 분규로 봐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비대위 대변인을 맡고 있는 박홍원 교수(신문방송학과)는 “학교 자치를 탄압하는 독선적인 교육행정이 이 사태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총장 직선제와 간선제 사이의 선택은 대학이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해야지 교육부가 재정 지원을 볼모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산대는 전국 38개 국립대 중 총장 직선제를 유지하고 있는 마지막 대학이다.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국립대는 총장 선출 방식을 직선제로 변경했다. 이전까지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총장을 임명했다. 총장 직선제는 학내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선거 과열로 교수들 사이에 파벌이 형성되는 후유증도 있었지만 교수들은 직선제의 장점이 더 많다고 봤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직선제의 폐단이 심각한 수준이라며 2011년 8월 ‘2단계 국립대 선진화 방안’으로 ‘총장 직선제 폐지’를 들고 나왔다. 당시 교과부(교육부)는 간선제 전환 여부를 대학 교육역량강화사업 평가지표에 반영했다. 한국교원대를 필두로 8개 교육대학이 먼저 총장 직선제를 폐지했다. 2012년 4월 평가를 앞두고 부산대와 경북대, 전남대, 전북대, 목포대, 한국방송통신대학을 제외한 32개 국립대가 총장 직선제를 폐지했다. 총장 직선제를 고수한 6개 대학 가운데 전북대만이 교육역량강화사업에 선정됐다. 이후로도 교육부는 전국 국립대에 지속적으로 공문을 보내 재정 지원 시 총장 직선제 개선 정도를 반영할 예정이라고 압박했다.

정부 입맛에 맞는 대학 총장 앉히고 싶어서?

안홍배 총장 대행은 부산대도 피해를 보았다고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에서 답했다. 총장 선출 제도를 변경하지 않아 2012년 교육역량강화사업에서 탈락해 한 해 50억~60억원 가량 재정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후보 시절 직선제를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던 김 총장이 간선제를 추진한 배경에는 교육부의 재정적·행정적 압력이 작용했던 셈이다.
 

ⓒ연합뉴스농성, 단식, 총장실 점거 등 그간 총장 간선제를 막기 위한 부산대 교수들의 노력은 부단했다.
간선제로 전환한 대학에서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공주대·경북대·방송통신대는 지난해 총장추천위원회를 통해 새 총장을 선출했으나 지금까지도 총장 자리가 공석이다. 교육부가 총장 임명제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국립대 총장은 학교가 후보자 2명을 추천하고 교육부 장관의 제청을 통해 대통령이 임명한다.

교육부는 구체적인 거부 사유를 밝히지 않고 있다. 학계에서는 총장 후보자의 정치 성향을 문제 삼은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총장 후보자인 김현규 공주대 교수, 김사열 경북대 교수, 류수노 방송통신대 교수는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류 교수는 총장 후보로 선출된 뒤 청와대로부터 인사 검증을 위한 전화를 받기도 했다. 류 교수는 “통상적인 절차 정도로 생각했고 시국선언 같은 민감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3개 국립대학 총장 후보자는 각각 교육부를 상대로 서울행정법원에 총장 임용제청 거부처분 취소소송을 내 잇달아 승소했다. 8월20일 서울행정법원은 김사열 경북대 교수의 손을 들어주었다. 앞서 김현규 공주대 교수도 1, 2심에서 모두 승소했다. 류수노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1심에서 승소, 2심에서 패소해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대학자율성 수호를 위한 경북대교수모임’ 소속 이형철 교수(물리학과)는 “직선제보다 간선제를 시행했을 때 총장 임명제청 거부에 대한 부담이 적다”라고 말했다. 선출 방식에 따라 총장 선거의 무게와 관심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전체 교수 1200명이 뽑은 총장과 30명이 뽑은 총장 중에 임명 거부 시 어느 쪽 반발이 심하겠나?”라고 되물었다. 이 때문에 국립대 교수들 사이에서는 직선제 폐지가 청와대나 교육부 입맛에 맞는 인물을 총장에 임명하기 위한 시도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네 차례 총장 임명제청이 거부된 한국체대는 올해 초 여당 국회의원 출신인 김성조 총장이 임명됐다.

김기섭 부산대 총장은 8월17일 밤 11시, 사의를 표명했다. 사고 이틀 뒤인 8월19일 부산대 대학본부와 교수회는 총장 직선제를 고수하기로 합의했다. 권진헌 전국거점국립대학교수회연합회 회장(강원대)은 “부산대가 직선제를 사수하면 다른 대학들도 총장 선출제에 대한 논의를 다시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교육공무원법 제24조 3항에 따르면 국립대학교는 “추천위원회나 해당 대학 교원의 합의된 방식과 절차”에 따라 총장을 선출할 수 있다. 법조문과 달리 현장에서는 총장 인선이 교육부 입김에 더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같은 날 황우여 교육부총리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총장 직선제에 폐단이 많다”라며 여전히 직선제에 대한 부정적인 의중을 내비쳤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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