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이 일어났다, 지역주의가 흔들린다, ‘대구 콘크리트’에 금이 갔다, 대구 유권자가 ‘호남당 후보’에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정당 대신 인물을 보고 투표하는 성숙한 유권자가 늘어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김부겸 후보가 ‘기호 2번’을 달고 대구시장 선거에서 40.3%를 득표하자, 여러 정치평론가와 중앙 언론이 쏟아낸 평가는 대략 위와 같았다. 말하는 이는 달라도, ‘지역주의의 철옹성’ 대구에서 ‘호남당 후보’가 ‘아름다운 선전’을 펼쳐 ‘40%라는 기적’을 만들었다는 줄거리는 한결같다.

특정 지역의 유권자 표심을 지역주의로 설명하면 꽤 간편하다. 모든 선거 결과 분석은 “지역주의의 벽은 높았다”와 “지역주의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둘 중 하나(때로는 둘 다)로 정리된다. 특히 대구와 같이 일관된 선거 결과를 보여준 도시라면, 지역주의의 결과라고 괄호 치기에 최적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지방선거를 하루 앞둔 6월3일 오전, 김부겸 후보가 길거리 유세를 펼치자 지나던 한 시민이 손가락을 들어 김 후보를 지지해주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지방선거를 하루 앞둔 6월3일 오전, 김부겸 후보가 길거리 유세를 펼치자 지나던 한 시민이 손가락을 들어 김 후보를 지지해주고 있다.

정말일까. 2014년 대구시장 선거는 ‘답이 없는 도시’에서 일어난 기적이자 지역주의가 완화되는 징후로 읽어내면 그만일까. 〈시사IN〉은 선거 막바지인 6월1일부터 선거운동 종료 시점인 3일 밤까지 김부겸 후보의 캠페인을 밀착 취재했다. 거기서 본 ‘괄호 안의 풍경’은 조금 더 복잡하고 다채로웠다.

김부겸 캠프 출입구에 놓인 대형 화이트보드에는 “된다!”는 글씨와 함께 중앙당 부속 민주정책연구원(민정연)의 여론조사 결과가 크게 쓰여 있었다. 43.3:43.3(2014. 5.31). 5월31일자 조사에서 소수점까지 같은 동률이 나왔다는 얘기다.

6월3일 대구 중심가인 동성로. 선거 마지막 유세에서 김부겸 후보는 한 지역언론사 1면 머리기사를 흔들며 외쳤다. “여기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대구시장 초박빙 접전! 여러분, 지금까지 대구 선거에서 ‘초박빙’ 이런 말이 나온 적 있습니까? 김부겸 찍으면 김부겸이 됩니다!”

김부겸 캠프의 목표는 ‘아름다운 선전’이나 ‘40%의 기적’이 아니었다. 정말로 이길 생각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투표 당일 서울로 올라가는 기자에게 캠프 인사 여럿이 똑같은 말을 했다. “지금 올라가면 역사의 현장을 놓쳐서 두고두고 후회할 텐데요?” 투표가 끝난 오후 6시, 김부겸 득표율 41.5%를 예상하는 출구조사 결과가 떴을 때, 캠프의 분위기는 선전에 대한 격려나 자축이 아니라 아쉬움과 탄식이었다.

‘박정희·박근혜 마케팅’이라는 위험한 전략

선거 초기에 내부 논쟁이 있었다. ‘아름다운 선거’를 할 것인가, ‘이기려는 선거’를 할 것인가. 이 논쟁에서 김 후보가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로부터 위험한 전략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박정희·박근혜 마케팅. 박정희 컨벤션센터 공약, 공보물에 박근혜 대통령과 나란히 웃고 있는 사진 싣기, “박근혜 대통령·김부겸 시장·대구 대박”이라는 메인 슬로건.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이 전략이 위험했던 이유는 김부겸이라는 브랜드를 야권 내에서 크게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대구시장 선거에서 패배한다고 그를 탓할 사람은 없지만, 이런 전략을 써서 패배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를테면 전당대회나 대선 경선과 같은 ‘진영 내 정치’를 할 때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한 캠프 인사는 “생각해봐라. 그때는 당내 경쟁 후보가 우리 공보물을 신나게 돌리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선거운동 마지막 날, 다음 유세 장소로 이동하는 후보의 차량 안에서, 왜 이렇게 위험하게 선거를 하는지 물었다. 김부겸은 한층 더 짙어진 대구 사투리로 이렇게 답했다. “선거전에 들어가니까 대구 시민들 사이에서 억눌린 분노가 들끓는 게 느껴지는데, 이게 장난이 아인기라. 야 이거 내가 이런 분노를 보고도 내 이미지 생각해서 선거를 대충 하면 안 되겠다, 진심으로 이분들에게 다가가야 되겠다 마음을 먹은 기지.”

더 흥미로운 논쟁은 그 다음이었다. 대체 어떤 게 대구에서 ‘이기는 선거’일까? 캠프 좌장 구실을 했던 김태일 교수(영남대)는 철저한 우클릭으로 보수 유권자들의 경계심을 녹인 후, “새누리당의 오만과 독선에 경고를 주도록 야당 후보도 한번 써먹어 달라”는 메시지를 구사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전선을 최대한 뭉개고 보수 표를 구슬려 잡아와야 한다고 본 것이다. 거침없는 박근혜 마케팅은 그 귀결이다.

그런데 홍의락 의원(새정연 대구시당위원장) 등 지역 접촉면이 넓었던 인사들은 오히려 반대 전략을 제안했다. 박근혜 마케팅은 어느 정도까지만 하고(불필요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선거전 중반부터는 새누리당(박근혜 대통령은 예외다)과 선명하게 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목표는 보수 표가 아니라 좌절한 무당파였다.

홍 의원은 6월1일 캠프 전략회의에서, 새누리당을 심판하는 데 김부겸을 쓰라는 ‘회초리론’을 제안했다. 지금까지와 같이 전선을 뭉개는 캠페인으로는 심판론에 불을 붙일 수 없다고 보고, 선거 막판에 한 단계 더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초리론’에 동조했던, 대구지역 선거 경험이 풍부한 한 캠프 인사는 캠프 주류의 전략 기조를 두고 “레드 콤플렉스 콤플렉스”라고 표현했다. 대구의 ‘레드 콤플렉스’ 정서를 실제보다 과대평가한 나머지 “이번에는 바꿔보자”라는 바닥 기류에 충분히 불을 붙이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결정적인 차이가 이 대목이었다. 후보에서 캠프 좌장으로 이어지는 핵심 라인은 대구에 무당파 심판 표는 많지 않다고 보았다. 그보다 새누리당에 마음이 상한 보수 표를 살살 달래서 데려오자는 전략이었다. 반면 ‘회초리론자’들은 대구의 무당파 심판 표에 불을 붙여 투표장으로 끌어내는 것이 핵심 전략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차이 못지않게 중요한 공통점도 있다. 두 노선 모두 ‘분노한 유권자’를 기정사실로 놓았다. ‘지역주의에 매몰되어 기호 1번을 묻지 마 지지하는 유권자’는 아예 머릿속에 없었다. 그런 유권자는, 투표 결과만 보는 다른 지역 관찰자의 상상 속에서나 다수파로 존재한다.
 

ⓒ시사IN 이명익김부겸 후보는 인적이 드문 아파트 단지에서 홀로 연설하는 ‘벽치기 유세’를 자주 했다. 대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유세하는 김 후보에게 시민들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대안을 봉쇄당한 유권자가 억눌린 분노의 출구를 찾지 못해 번번이 좌절하는 도시. 지역주의라는 괄호 치기에 가려져서 보지 못했던 대구의 또 다른 일면이었다. 김부겸 후보는 “주된 갈등 축은 이미 수도권 대 지방으로 재편되었는데, 정치가 잘못되어 있으니까 아직도 갈등 축이 영남 대 호남인 것처럼 왜곡되어 있다. 그러는 사이에 대구는 경제적으로 가라앉는 도시가 됐고, 이제는 시민들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절박하게 느끼고 있다”라고 말했다. 홍의락 의원은 “대구는 산업화를 이끌어왔다는 자부심이 있는 도시다. 지금 그 자부심이 상처를 받았는데, 그동안 도시를 운영한 세력을 응징할 방법이 없어서 이중으로 분노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후보 김부겸은 그 분노의 출구를 어느 정도 뚫어주었고, 유권자는 순식간에 40.3%라는 지지율로 답했다. 이마저도 쌓인 분노를 충분히 받아내지 못한 것이라는 의견이 캠프 내에서 만만찮을 정도였다.

대구 유권자는 ‘호남당’이라 2번을 안 찍는다?

그렇다면 대구 유권자는 왜 분노하면서도 대안이 봉쇄되었다고 느낄까? ‘기호 2번’을 대안이라고 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호남당’을 꺼리는 지역주의의 귀결일까? 사흘 동안 만난 대구 유권자들에게 왜 ‘2번’은 찍지 않는지를 물었다. 다수 의견은 두 가지로 모였다. 무책임하고 말 바꾸기를 하는, 반대만 하는 세력. 찍을 사람 없는 정당. 즉, 세력의 태도와 인물에 대한 불신이 핵심이었다.  “호남당이라서”라는 말은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영남이나 호남처럼 정치적 선호도가 기울어진 지역에서는 양질의 엘리트가 우세한 세력(대구에서는 새누리당)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다. 기회가 불균등하게 한쪽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인물 경쟁력에서 차이가 생긴다. 6월1일 동성로에서 김부겸 후보의 유세를 유심히 듣던 직장인 정 아무개씨(43)는 “나는 새누리당을 좋아하지 않지만, 선거 공보물을 보면 여당 후보들이 대개 인물이 나았다. 지금껏 선거가 계속 그랬다. 이번 대구시장 선거는 야당도 볼만한 인물이 나오니까 당장 게임이 되는 거다”라고 말했다.

정치적 선호도가 기울어진 지역에서, 불리한 세력은 ‘나쁜 생존법’을 채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새정연 중앙당의 한 인사는 대구·경북 지역의 몇몇 지역 정치인을 두고 “생계형 출마자”라고 독설했다. 당선을 목표로 하는 출마가 아니라는 얘기다.

‘생계형 출마’의 문법은 이렇다. 첫째, 지역 대표성을 확보하면 전당대회나 대선 후보 경선에서 어느 정도 지분을 행사할 수 있다. 당권·대권 주자들이 구애를 해오고, 전대나 경선이 끝나면 ‘배려’를 받기도 한다.

대구·경북(TK)과 같은 취약 지역은 지역 조직을 장악하려는 새정연 내부 경쟁이 크지 않다. 본선에서의 당선이 아니라 당내 선거에서의 지분 확보를 노리는 정치인의 침투에 취약한 구조다. 오래전부터 TK에 머무른 한 야권 정치인은 “이 지역에 헌신해온 많은 동지들이 있지만, 한편으로 선거 출마는 교두보이고 전당대회가 ‘본게임’인 사람이 적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둘째, 집권당일 경우에는 불모지에서 광역단체장 후보로 출마한 뒤 정권으로부터 장관급 자리 등을 ‘보답’받는 경로가 있다. 생계형 출마의 스케일 큰 버전이다. 2006년 당시 열린우리당 경북지사 공천을 받은 박명재 후보는 선거가 끝나고 반년 만에 행정자치부 장관에 임명되어 지역을 떠났다. 그는 지난해 10월 경북 포항남구·울릉군 재·보선에서 새누리당 공천을 받아 금배지를 달았다.

이런 사례가 누적되면서, 지역 유권자는 새정연은 못 믿을 세력이라는 인식을 굳혀갔다. 유권자가 보기에 새정연 후보 중 적잖은 이가 잿밥(당내 선거)에만 관심이 있는 함량 미달 인사이거나, 지역 헌신을 외치다 선거가 끝나면 서울로 올라가 감투를 쓰는 말 바꾸기 후보였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취약한 세력에게는 이런 ‘나쁜 생존법’이 침투하기 쉽고, 유권자가 그런 후보를 외면으로 응징하는 것을 지역주의로 낙인찍기는 힘들다. 김부겸 후보는 선거 유세 내내 “저희 당이 오만하고 무책임하고 말을 바꾼다는 말씀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바꾸겠습니다. 제가 당내에서 싸워나가겠습니다”라고 외쳐야 했다.

그렇다고 상대적으로 양질의 인물을 공급받는 세력(대구에서는 새누리당)이 만족할 만한 대안이 되어주지도 않는다. 여기에도 묘한 논리가 작동한다. 안락한 텃밭에서 활동하는 정치인은 전국 단위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으므로, ‘더 큰 꿈’을 꿀수록 수도권에서 이력을 쌓으려는 경향이 있다.

자연히 지역 정치의 인재풀은 좁아진다. 유권자의 마음을 얻는 본선 경쟁 대신, 당내 공천권자를 향한 충성 경쟁에 특화된 정치인이 득세하는 구조가 된다. 대구에서 ‘차세대’ 소리를 듣는 정치인은 유승민 의원(새누리당) 정도가 사실상 유일한데, 유 의원도 2005년 노무현 정부의 이강철 시민사회수석이 출마하는 바람에 비례대표까지 사퇴하며 ‘징발’당한 특이 사례다.

이로써 거대한 딜레마가 완성된다. 대구에서 야당은 ‘나쁜 생존법’의 침투에 취약해지며 후보군의 질 저하에 직면한다. 여당은 여당대로 유권자 확보 경쟁보다 공천 확보 경쟁에 특화된 라인업이 꾸려진다. 도시의 하락세를 체감하는 유권자가 새누리당을 심판하고 싶어도, 야당의 ‘더 나쁜 대안’을 받아들면 별수 없이 새누리당을 찍거나 아예 투표를 포기해버린다. 응징파 유권자의 투표율이 떨어질수록(대구는 2010년과 2014년 지방선거 투표율이 최하위였다) 새누리당 고정표는 더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착시’가 일어난다. 대안을 봉쇄당한 유권자의 분노는 쌓여가는데, 선거는 이전과 변함없는 결과를 되풀이한다. 선거 결과만 확인하는 다른 지역의 관찰자들은 “이번에도 지역주의”라는 말로 편안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며 자가 증식한다.

전국 최하위 투표율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 구도에서 ‘지역주의’라는 괄호 치기는 여야 모두에게 안락한 도피처가 된다. 야당은 ‘나쁜 생존법’ 대신 은근히 유권자에게 패배의 책임을 돌릴 수 있다. 여당은 유권자의 심판 욕구가 존재하지 않는 양 뭉갤 수 있다.

새누리당은 이 구조의 최대 수혜자여서 딜레마를 깰 의사가 없다. 유권자는 딜레마를 깰 주체가 될 수 없다. 정치적으로 대안을 봉쇄당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딜레마를 깨는 과정은 야권에서 ‘말이 되는 인물’이 장기적으로 도전해 유권자에게 대안을 제공하는 길밖에 없는데, 이 역시 정치 생명의 희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무척 어렵다.

2년 전부터 시작된 김부겸의 도전이 제대로 평가받아야 할 대목도 여기다. 그가 대구라는 무심한 콘크리트를 돌연히 흔들었다는 관점은 정확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다른 지역과 다름없이 분노도 하고 응징도 원하지만 대안을 봉쇄당한 유권자에게, 그는 정치 생명을 건 도박으로 선택지를 추가해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김모(본인)가 예뻐서가 아이고, 아이고 그래 야 정도면 쟈들(새누리)을 한번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겠다 해서 지지해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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