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파업한 노동조합에 손해배상 판결을 내릴 때 꼭 언급하는 법 조항이 있다. 노동조합법 제3조, 즉 “사용자는 이 법에 의한 단체교섭 또는 쟁의행위로 인하여 손해를 입은 경우에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에 대하여 그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라는 조항이 그것이다. 여기서 방점은 ‘이 법에 의한’에 찍힌다. 이 법에 의한 ‘정당한(합법적인) 쟁의행위’일 때만 손해배상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게 우리 판례의 일관된 해석이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합법 파업을 하기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점이다. 주체·목적·절차·수단 중 하나라도 정당하지 못하면 해당 파업은 불법 행위가 되고, 이때 기업은 노조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위법 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민법 제750조를 그대로 적용한 결과다. 쌍용자동차 노조 47억원, 현대자동차 노조 90억원 등 일련의 손배 판결은 이런 논리에 따라 내려졌다.

ⓒ우원식 의원실 제공민주당 을지로위원회는 손배·가압류 관련 법안 개정을 중점 추진 법안에 포함시킬 예정이다. 위는 3월5일 노란봉투 프로젝트 행사를 하는 위원들.

이 같은 관행에 제동을 걸려는 움직임이 11년 전에 있었다. 회사 측의 손배·가압류에 항의하며 2003년 1월 두산중공업 노조원 배달호씨가 분신자살하자 ‘신종 노동탄압-손배 가압류’가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당시 민주노총이 집계한 손배·가압류 금액은 50개 사업장 2222억원에 달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은 그해 3월 노조법 개정에 관한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청원서는 노조법 제3조의 ‘이 법에 의한’이라는 표현을 삭제하는 대신, 폭력이나 파괴 행위로 인해 발생한 손해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배상 책임을 인정하도록 노동조합법을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배상을 청구하더라도 △폭력이나 파괴 행위로 인한 ‘직접 손해’에 대해서만 청구할 수 있도록 하며 △노동조합의 결정에 따라서 이뤄진 행위라면 근로자 개인에게는 청구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업 등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한 가압류는 금지한다는 내용도 포함했다.

이런 노동계 요구를 담아 단병호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이 17대 국회 때인 2004년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기존 청원서 내용에 더해 △‘영업손실로 인한 손해 및 제3자에 대한 채무 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를 손해배상 범위에서 제외하고 △근로자의 신원보증인에게는 노조 활동으로 인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없다고 규정한 조항이 추가됐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정부가 제출한 대안 법률에 반영됐다는 이유로 폐기됐다. 하지만 손배 청구 제한 내용은 공포된 정부 개정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때 함께 묶여 폐기된 노조법 개정안 중에는 열린우리당 의원 것도 있었다. 김영주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은 △폭력 또는 파괴 행위로 인해 손해를 입은 경우 그 직접 손해에 한해 배상 청구 가능 △손해배상 청구를 하더라도 근로자의 신원보증인에 대해서는 가압류 금지 △쟁의행위로 가압류를 신청한 경우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에게 소명할 기회를 줄 것 등을 골자로 하는 노조법 개정안을 제출했으나 이 법안 역시 빛을 보지 못했다.

ⓒ연합뉴스2005년 노·정 관계 복원 논의가 시작됐다. 가압류 관련 민법이 일부 개정됐지만 실효성은 거의 없었다.

2005년 민사 집행법 개정 이후 제자리걸음

10년 동안 진전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배달호씨 사망 이후인 2003년 5월 출범한 노사관계제도선진화연구위원회는 그해 12월 노동부에 ‘노사관계법·제도 선진화 방안’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는 △신원보증인의 책임제한 설정 △임금 압류 시 조합원의 최저생계 보장 △노동조합의 존속 보호를 위해 조합비 수입의 일정 부분을 압류 대상에서 제외 등 세 가지를 개선 방안으로 제시했다. 또 가압류와 관련해 다수 의견은 가압류 일반 절차나 실무를 개선해야 한다고 했지만, 소수 의견은 파업 철회 유도 등 부당노동행위에 이용되는 걸 방지하고 근로자의 일상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가압류를 금지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연구위원으로 참여했던 이승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손해배상 청구를 직접 제한하는 방법도 논의가 되긴 했지만, 반대 의견이 많아 최소한만 하자는 선에서 정리됐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렇게 광범위하게, 체계적으로 기업이 손배 청구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가자는 주장이 우세했다”라고 말했다.

이 제안들 중 실현된 것은 ‘가압류 시 최저생계 보장’과 ‘가압류 절차 개선’ 정도다. 2005년 1월 정부는 급여 중 최저생계비에 해당하는 금액은 압류를 금지하고(종전에는 급여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을 압류했다), 부당한 가압류·가처분 취소 절차를 간편하게 하는 내용으로 민사 집행법을 개정했다. 그 결과 현재 월 150만원까지는 압류가 금지된다. 사법부도 2003년 10월부터 가압류 발령 단계에서 심문 제도를 활용하는 등 제도를 개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상은 거의 아무런 제한 없이 가압류가 이뤄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속노조 법률원 김태욱 변호사는 “가압류 결정 전에 심문이 이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쌍용자동차 노조원 가압류 때도 심문 없이 바로 결정이 났다. 판사의 재량이기 때문에 거의 실효성이 없고, 사후 이의 제기를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가압류 결정을 내린 판사에게 하는 것이라 수용 가능성이 낮다”라고 말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제외하면 여전히 가압류에 별다른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법 제3조는 지금까지도 손해배상 판결의 방패막이가 아닌 근거 조항이 되고 있다.


현재 19대 국회에 발의돼 있는 법안 중 파업으로 인한 손해배상과 직접 관련된 법안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2012년 6월 대표 발의한 것으로, 손배 관련 내용은 17대 국회 때 나온 노조법 개정안과 같다. 노동계가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안이다.

다른 하나는 전순옥 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6월 대표 발의한 ‘노동쟁의의 민사적 책임제한에 관한 법률안’이다. 파업을 비롯한 노조 활동의 △목적이 정당하지 않고 △방법이 사회 상규에 반해 현저히 부당하며 △노동자가 얻는 이익에 비해 사용자가 받는 피해가 현저히 크다는 것을 사용자가 입증해야만 손배 청구를 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전순옥 의원실의 조영학 보좌관은 “처음에는 민법이나 노조법 개정을 검토했는데, 이것이 법체계상 어렵다면 특별법으로라도 요건을 까다롭게 정해서 손배 청구를 최소화해보자는 취지다. 사용자가 3가지 요건을 모두 입증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이 법이 통과되면 실질적으로 손배 청구를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존 법안 외에도 ‘노란봉투 캠페인’의 흐름을 타고 새로 법 개정 움직임이 일고 있다. 3월5일 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소속 의원들과 보좌진이 노란봉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2013년 5월 민주당 최고위원회 의결로 구성된 을지로위원회(을을 지키는 법law, 길路, 노력이라는 의미)는 갑을 논란을 일으킨 남양유업과 상생 협약을 체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 ‘기업 잡는 저승사자’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이 위원회 소속 은수미 민주당 의원은 손해배상·가압류를 해결하자는 취지로 지난 2월26일 출범한 사회적 기구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잡고)’에도 참여하고 있다. 은수미 의원은 “손잡고에서 가칭 ‘법·제도 개선위원회’를 만들어서 전문가들을 불러 모아 가장 효과적인 법안을 검토해 국회에 제안할 것이다. 을지로위원회 소속 위원들도 이미 개별적으로 법안 검토를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이 위원회 소속 장하나 의원실 최용 비서관은 “대법원 판결 이전에는 잠정적으로 합법 파업이라 보고 가처분·가압류를 금지하는 법안을 준비 중이다”라고 말했다. 의원들이 발의하는 손배 관련 법안은 논의를 거쳐 을지로위원회 중점 추진 법안에 포함될 예정이다.

그렇다면 이런 노력으로 ‘손배 폭탄’에 제동을 걸 수 있을까. 넘어야 할 벽은 만만치 않다. 2013년 12월20일 열린 제321회 환경노동소위 제4차 회의록을 보면, 정현옥 고용노동부 차관은 “정당한 쟁의행의는 지금도 완전히 면책되고 불법행위에 대해서도 생계를 보호하기 위한 범위 내에서 특별보호 규정이 있다. 추가적으로 민사상 특별보호를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라고 노동부 방침을 밝혔다.

위헌 시비, 정부 반대 등 난관 극복해야

많은 전문가들도 다른 불법행위와의 형평성 문제를 지적한다. 이승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문제의 핵심은 우리나라의 쟁의행위에 대한 정당성 판단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것이다. 손배 청구 자체를 제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고 효과도 크지 않다”라며 입법적 해결보다 판례 태도가 먼저 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1982년 형법을 위반했거나 파업권 행사로 보기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파업으로 입은 손해에 대해 배상을 청구할 수 없게 하는 법을 제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헌법원(Conseil Constitutionnel)이 ‘평등 원칙을 침해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런 지적에 대해 김태욱 변호사는 “사법부의 판결이 엄격하게 나오는 경향을 고려하면 입법 조치가 우선되어야 한다”라고 반박한다.

‘손잡고’에 따르면, 2월28일 현재 노동계에 청구된 손해배상 금액은 1691억6000만원에 달한다. 노동조합 간부나 개별 노동자 등을 상대로 동산·부동산 등을 가압류한 액수만도 182억8000만원이다.

사법부 판결도 문제지만 업무방해죄가 살아 있는 형법, 손배·가압류 판결의 바탕이 되는 민법, 그리고 합법 파업의 범위를 제한하는 노동법 모두가 수술 대상이라는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다. 은수미 의원은 “노동 관련 법 개정은 사회적 공감대가 중요하다. 노란봉투 모금액이 8억원이 넘는 등 사회적 반향이 커지는 것에 발맞추어, 한 조항이라도 통과시킨다는 마음으로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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